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국화(國華). 충좌위사직(忠佐衛司直) 변확(邊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토산현감(兎山縣監) 변자정(邊自靖)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변위(邊偉)이다. 어머니는 부장(部將) 민희현(閔希賢)의 딸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뒤, 용양위부장(龍驤衛部將)·벽동군수·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강계부사 등을 지냈다. 1583년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경원부(慶源府)에 침입하자 길주목사 겸 조방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시기한 주장(主將)의 무고로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북변(北邊)의 여진족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순천부사가 되었다. 1591년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뱃길로 행재소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협력해 강화도를 방어하고, 조정의 명령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어 충청도병마절도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7년 경기우도방어사(京畿右道防禦使)가 되었으며, 1599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으나 문신·언관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 가운데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난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에 복직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지훈련원사가 되어 비변사의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1604년 포도대장으로서 임진왜란 후 혼란한 장안의 치안을 바로잡았다. 당시 도적들이 유성군(儒城君) 유희서(柳熙緖)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과 관련하여 유희서의 첩이 사통(私通)한 외간 남자를 조사하던 중,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臨海君)도 그녀와 관계한 정황이 드러났다. 변양걸이 모두 체포하여 국문하고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자 선조가 대노하여 동래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도총관·수원부사 겸 방어사를 거쳐 제주목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 관마(官馬) 10여필을 훔쳤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제주도에서 얻은 풍토병이 악화되어 1610년(광해군 2)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