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극(極), 법호는 선산(禪山). 전라남도 장성 출신. 12세 때 전우(田愚) 밑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9년 구례 천은사 승 하용화(河龍華)를 만나 입산수도하였다.
그 뒤 큰 뜻을 품고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졸업한 뒤,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상해 한인청년회장, 해외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8년 봄,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형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광산업을 하였고, 1945년 광복 이후 정치단체인 민의사(民意社)를 만들어 정계에 투신하려고 하였으나, 좌우익의 극한대립 속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교육에 뜻을 두어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세워 유지기반을 닦은 뒤 다시 고등교육에 투신하였다.
1968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서울대학교·이리농과대학·전남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봉직하였다. 원불교에 입교한 것은 1965년 전남대학교 재직당시였다.
정년퇴직 뒤 가정을 정리하고 원불교중앙총부에 들어가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초대학장, 법은재단(法恩財團) 이사장, 법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한편 중앙요양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봉직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1973년부터 전무출신으로 봉직하면서 수양에 힘썼고, 죽을 때까지 원불교 교단발전에 기여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받았으며, 교육자로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