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직접 겪은 한 여인의 수기이다. 표지에는 ‘병인양난녹’으로 되어 있으나, 원표제는 ‘병인년양난시가사라’이다. ‘병인년십이월긔’라는 날짜가 있고, ‘慶州金氏之所著也(경주김씨지소저야)’라고 뒷면에 적혀 있다.
이주홍(李周洪)이 1951년에 발견하여 부산의 『국제신보(國際新報)』에 1954년 6월 27일부터 10회에 걸쳐 처음으로 소개하고, 그의 수필집 『뒷골목의 낙서(落書)』에 다시 전문을 실은 바 있다.
병인년 12월에 썼다면 전란이 끝난 직후의 생생한 체험기이다. 당시 강화도에 살고 있었던 사대부가의 며느리로서, 가정사를 중심으로 직접 보고 들은 일을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여기에는 작자가 처음으로 서양인을 대하였을 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만리경(萬里鏡)·유리병, 그리고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물건들이 신기하다고 하였다. 양선(洋船)에 대해서는 그 크기가 산더미 같다고 하고, 노를 저어 가지 않고 연기를 피우며 다닌다고 하였다.
환란에 처한 관원들과 백성들의 상황도 소개되어 있다. 군병이나 관원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사대부집 부인답게 의연함을 지키며, 땅에 떨어진 윤리와 기강을 개탄하고 있다.
적군에 부역(附逆)하는 자, 어지러운 틈을 타 노략질까지 하는 백성도 있었다고 한다. 이판서(李判書)의 형제는 목숨을 걸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프랑스군은 약탈·방화·부녀자 능욕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양헌수(梁憲洙)가 자원하여 평안도 군사 500명을 이끌고 전등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러, 결국 적군을 몰아낸 내용도 있다. 이 밖에 많은 부분에는 피난을 다니며 겪은 고초가 기록되어 있는데,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죄목의 있고 없음을 반성하는 엄숙한 장면도 있다.
이 기록은 병인양요를 직접 체험한 피해자의 수기로서, 당시의 상황을 부녀자의 시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편, 당시 종군하였던 프랑스군 장교의 수기인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원정기」는 가해자의 처지에서 서술된 기록으로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