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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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정면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정면
서예
유적
국가유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고려후기 승려 원명국사 충감과 관련된 탑비. 선사비.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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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고려후기 승려 원명국사 충감과 관련된 탑비. 선사비.
내용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97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圓明國師)의 비이다. 원래는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보광사지(普光寺址)에 있던 것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원래의 비(碑)는 1285년(충렬왕 11)에 세웠고 1750년(영조 26)에 개각(改刻)하였다. 현재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은 없어지고 비신(碑身)만 남아 있는데, 비신의 가장자리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유려하게 조각하였으며 윗부분을 귀접이하였다.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篆額)이 있고, 비제(碑題)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刱碑)”로 되어 있다. 비문은 원나라의 위소(危素)가 짓고 양지(楊池)가 썼으며, 주백기(周伯琦)가 액(額)에 전(篆)하였다.

비음(碑陰)에 적혀진 추기(追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전우(殿宇)가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기적비(紀蹟碑)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락(剝落)하여 원명국사의 유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주지(住持) 석능일(釋能一)이 고쳐 새기니 비지(碑誌)가 천년 만에 거듭 새로워져 밝기가 어제 같다고 하였다. 개각 연대는 1750년 6월 20일이며 이충언(李忠言)이 각자(刻字)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의 미』15 석등·부도·비(정영호 감수, 중앙일보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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