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 있어서의 중국과 고대의 인도는 물론, 서양에 있어서도 고대의 그리스·로마·게르만사회도 부권제적 구조였고, 중국과 로마의 부권제가 전형적이었다.
중세·근세가 되어서도 부권적 경향이 계속되었고, 19세기 후반까지는 부권제적 가족제도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부권제 가족제도는 모계적인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부계적이었다.
부권적·부계적 가족제도는 아버지인 남자가 가장으로서 일가를 통솔하고, 가산은 대대로 남자 특히 장남인 가장에게 계승되고 가장만이 재산을 소유하며, 다른 가족은 원칙적으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중국에서 가족 내의 권력은 가장권·부권(父權)·부권(夫權)으로 분립하였으므로, 고대 로마의 가부장 권력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는 역사시대에 들어온 뒤로는 원칙적·일반적으로 부권제사회였으며, 모권제적·모계제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부권제적 가족의 이념적 특색을 요약하면, 첫째로 부가장(父家長)은 가족에 대하여 절대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인 부(父)·부(夫)는 하늘에 비유되고 가족은 인격적 독립성이 부여되지 않고 거의 소유물시되었다.
여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정조가 강제된 반면 남자는 일부다처·중혼·축첩은 물론, 실제로 매처(賣妻)나 처를 전당잡히는 전처(典妻)의 특권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혼도 처만이 일방적으로 축출되는 칠거(七去)가 법률상 보장되고, 가족 내에서의 위계체통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존비·장유의 질서가 강제되었다. 중요한 물건의 처분권은 가장에게 속하거나 적어도 최종적 결정권을 가진다. 가장의 동의 없이 임의로 재산을 처분하거나 그 부담으로 될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었다.
혼인을 비롯한 친족적 신분행위는 가장의 명령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혼도 당사자의 원·불원간에 가장의 의사에 따라야 했다. 가장에게 잘못이 있어 간(諫)할 경우에 가장이 노해서 매질하여 피가 흐르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더욱 공경하고 순응하라고 하여 절대복종의 예속이 강요되었다.
둘째로 가산에 대하여 가장이 독점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온 재산은 물론, 자기가 취득한 재산을 자기가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처분하였다. 처나 자녀의 소유물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용·수익·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가장은 가계계승자로서 가(家)의 영속성을 실현할 권리와 책임이 있었다. 가부장제 가족은 조상숭배를 성립시킬 중요한 사회적 기반으로서 조상숭배, 제사의 계속, 가의 계속은 가족생활의 기본원리이다.
가장권을 포함한 제사상속에는 적장자손(嫡長子孫)의 상속주의가 관철되며,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동종(同宗)의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에 합당한 자를 입양함으로써 가계의 영속을 도모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처나 자녀의 권리가 강하게 인정됨으로써, 부권(父權)은 미성년자에 대한 친권(親權)으로 분화되고 아울러 부권(夫權)도 약화되었고, 통일적인 가장권은 거세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민법>상 호주제도를 두어, 호주권이 비록 상징적인 허유권(虛有權)에 지나지 않으나 원칙적으로 장남이 호주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남자의 호주권은 호주상속제도에 의하여 적장자손에게 상속된다. 호주권은 포기할 수 없고, 호주의 장자손은 분가하거나 타가(他家)에 입양할 수 없으며, 호주로 된 양자의 파양(罷養)을 금지하는 등 부권제적 기본요소가 법제상으로도 강하게 보장되어 있음은 물론, 부권제적 의식과 가치관도 아직 뿌리깊이 잔존하고 있다.
한편, 산업화에 따르는 가족제도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민주화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법적 지위는 옛날에 비하여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므로 부권제는 과거의 것으로 되어 부부평등·남녀평등의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