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동안(東岸)에 인접한 표고 35∼50m 정도의 낮은 구릉상에 형성되어 있는 고분군이다. 1980년 이곳에 대규모의 주택단지 조성공사로 인해 소멸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1981년 1월부터 4월까지 부산시립박물관의 주관 하에 구제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A∼E지구의 5구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나, C∼E의 3지구에서만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종료 뒤 택지조성으로 이 유적 자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C지구에서 29기, D지구에서 22기, E지구에서 18기의 분묘가 확인조사되었다. D지구의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 9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었다.
이 유적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묘제는 평면플랜이 장방형인 이른바 수혈계(竪穴系)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일색인 점이 특징적이다. 수혈계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묘광을 깊이 파서 양장벽(兩長壁)과 단벽을 할석으로 쌓아올리고 뚜껑돌을 덮었으며, 뚜껑돌과 돌방의 상단벽은 지표 위에 드러나게 축조된 반지상식의 돌방이다.
돌방 벽의 축조는 오벽(奧壁)은 수직으로, 양장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게 쌓았으며, 입구는 바깥에서 할석으로 쌓아올려 폐쇄하였다. 또 이들 중 비교적 대형 돌방무덤에는 원형의 호석을 두른 경우도 있다.
바닥은 점토를 깔아 다진 것도 있으나, 거의 전면에 소형 할석을 깔아 시상(屍床)을 마련한 것이 많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시상을 추가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이를 통한 정확한 추가장(追加葬)의 횟수가 밝혀지고 있다.
이를테면 3차에 걸쳐 부석시상(敷石屍床)이 추가 설치된 C지구 제20호분은 적어도 3회 이상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그 밖에 이 유적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대부분에 적어도 1회 이상에 걸쳐 추가장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C지구 제20호분, E지구의 제10호분과 제16호분과 같이 묘실(墓室)의 장측(長側)의 추가로 확장된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존재는 이 유적에 추가장이 행해졌음을 뒷받침해주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이러한 돌방무덤의 주위에서 제사유구(祭祀遺構)의 한 형태로 생각되는 유구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C지구 4·15·16·17호분 주위의 것과 같이 대개는 작은 괴석을 원형으로 둘러 만든 석조시설물로 되어 있지만, A지구 24호분과 같이 항아리를 묻어놓은 형태도 있었다.
또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배묘(陪墓)로 추정되는 소형 돌방이 C지구에서 2기가 조사되었다.
한편, D지구에서 발굴조사된 9기의 구덩식 돌방은 전대(前代)의 전형적인 구덩식 돌방무덤 계보의 묘제가 아닌, 이 지구의 앞트기식 돌방무덤과 일정한 친연관계를 가진 배묘 혹은 부속시설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며 출토량도 빈약하다. 토기류와 철기류로 대별된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유대완(有臺盌)·짧은목항아리[短頸壺]·완(盌)·적갈색연질옹(赤褐色軟質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기류로는 도자·촉·도끼·낫·철모(鐵鉾) 등이 있다.
그 밖에 장신구로는 금동제세환이식(金銅製細環耳飾)과 방추차 등이 소수 나왔다. C지구 21호분에서는 청동방울[靑銅鈴]도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가장 표식적인 유물은 정형화된 단각고배(短脚高杯)와 부가구연(附加口緣)의 긴목항아리이다.
이 유적의 연대는 유물로 볼 때,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걸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유적은 낙동강 하류지역에서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의 본격적인 유행이 이 무렵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고분군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