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남동의 남쪽으로 돌출된 반도 중복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우역시험장(牛疫試驗場)이 있어서 당시는 ‘우역시험장구내패총’이라고도 불렸다.
1923년에 일본인 도리이(鳥居龍藏) 등에 의하여 발견된 이후, 여기에서 출토, 채집된 유물들은 현재 일본의 경도대학(京都大學)의 ‘우메하라(梅原末治) 고고자료’와 덴리대학 참고관(天理大學參考館)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덴리대학 참고관의 토기편 10여 편, 마제석부(磨製石斧) 2점, 조개팔찌〔貝輪〕 1점과 ‘우메하라 고고자료’의 토기편 6점, 맷돌로 생각되는 석기편 1점, 골제첨두기(骨製尖頭器) 1점이 현존하는 유물의 전부이다.
토기편은 주로 구연부편(口緣部片) 및 유문(有文)의 파편이다. 구연부편은 입술 주변을 겹으로 씌운 이중구연부(二重口緣部)와 그렇지 않은 홑구연의 두 형식이 있다. 이중구연의 토기는 구경 35㎝ 전후의 대형 토기인 반면, 홑구연토기는 구경 15㎝ 전후의 소형 토기이다.
그릇 표면은 주로 암갈색이고 내면은 밝은 적갈색을 띤다. 태토(胎土)는 암갈색을 띠며 활석립(滑石粒)이 혼입되어 있는 예가 있다. 문양은 구연부 가까운 곳에 시문되어 있다. 단사열선(短斜列線)을 옆으로 조잡하게 그은 것이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손톱무늬〔瓜形文〕를 일렬로 돌린 것도 있다.
이와 같이 이중구연의 토기와 이러한 문양구성은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패총인 부산 금곡동패총과 김해 수가리패총 Ⅲ기층 출토토기의 표지적인 기형(器形)과 문양이 같아 이 패총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석부는 2점 모두 완형이며 경사암제(硬砂岩製)이다. 조개팔찌는 2매패(二枚貝) 중의 1매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이 유적의 보고자는 이중구연토기의 존재, 정연하지 못한 상태의 문양구성 등을 들어, 암남동패총 출토의 토기를 즐문토기의 범주에 넣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무문토기의 한 형식인 서북지방 팽이형토기와 관련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부 지방에 팽이형토기와 남부 지방의 이중구연토기를 연결시킬 만한 토기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양자의 관계는 아직도 불명확하며, 따라서 암남동패총의 토기를 남해안 즐문토기의 말기에 속하는 형태로 취급하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우세하다.
현재 암남동패총은 약간의 패각편(貝殼片)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 소멸되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