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良東)이라는 자연촌락에 인접하고 있어 흔히 ‘양동 유적’이라고 한다.
유적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게 뻗은 높이 25∼35m 정도의 완만한 구릉 위에 조성되어 있다. 앞에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강인 회야강(回夜江)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고 있어 유적입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적은 회야강댐과 연계되는 울산시 정수장 시설공사로 크게 파괴되었거나 계속 훼손될 처지에 있어, 1984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긴급구제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발굴은 완전히 소멸될 곳과 그 주변 단애부(斷崖部)의 극히 한정된 지역에만 실시되어, 시설공사에 의해 파괴된 부분 외에 유적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조사 결과, 이 유적은 분묘 유적으로서는 이 일대에서 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발굴에서 청동기시대의 방형 주거지 5동(棟), 삼국시대의 덧널무덤[木槨墓] 9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23기, 소형 수혈식 돌방무덤 1기, 옹관묘 1기,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1기, 움무덤[土壙墓] 1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 수혈유구(圓形竪穴遺構) 1동 등 모두 42기의 다종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삼국시대에 조영된 분묘 및 과수원 등의 조성으로 완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출토유물로 보아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전환하는 단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화덕자리[爐址]는 주거지 내부 중앙에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소수혈(小豎穴)을 파서 화덕으로 이용하고 있는 점과 주거지 벽을 따라 벽체(壁體) 등을 세우기 위한 시설과 배수구 구실도 겸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구(溝)를 만든 구조 등이다.
덧널무덤은 이 유적의 중심부인 정상부에 분포해 있었다. 출토유물로 보아 4세기에서 5세기 전반대에 걸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형(墓形)은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넓은 낙동강 하류역에 밀집분포하고 있는 같은 시기의 덧널무덤과는 달리, 너비가 매우 좁고 길이가 긴 형태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이 유적의 분묘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덧널무덤이 구릉의 정상부에 분포되어 있는데 비해 구릉의 사면(斜面)에 영조,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연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분묘가 입지조건이 좋은 중심부를 선점(先占)하고, 시기가 내려올수록 묘역(墓域)이 주변으로 확산되어나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돌무지덧널무덤들이 구릉 위에 영조되어 있는 점은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들이 평지에 떼[群]를 이루면서 조성되어 있는 입지적 특색과는 매우 다르다. 구조는 경주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과 동일하다.
이러한 돌무지덧널무덤은 다곽식(多槨式)과 단곽식(單槨式)으로 나뉜다. 전자는 소형이며, 후자는 주로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인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연대는 출토유물의 검토에서 5세기 후반대에서 6세기 전반대로 밝혀졌다.
현재 떼를 이루고 있는 돌무지덧널무덤군의 유적으로서는 이 곳이 돌무지덧널무덤군의 분포남한선(分布南限線)이 된다. 이 점에서 이 지역은 이 무렵, 혹은 보다 일찍부터 경주와의 친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기의 옹관묘는 인접한 돌무지덧널무덤의 배묘(陪墓)이며 소아용 무덤이다. 1기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평면이 장방형이고, 추가장(追加葬)이 행해졌음이 확인되었다.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공렬토기편(孔列土器片), 그 밖에 무문토기편·단도마연토기편(丹塗磨硏土器片) 등과 숫돌·대석(臺石) 등 약간의 석기류들이 검출되었다. 덧널무덤·돌무지덧널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 등의 삼국시대 분묘에서는 다량의 전형적인 신라토기류와 각종의 철제무구·공구류 및 금제귀걸이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이 지역의 문화구명에 중요하다. 특히, 신라고분과 토기의 편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돌무지덧널무덤 이전의 신라지역의 묘제는 목곽묘였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