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은 상품 집산지(集散地)에서 구입한 일용 잡화물을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지방의 시장을 중심으로 순력행상(巡歷行商)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교환경제를 매개하는 전문적인 시장 상인이었다. 부상청이란 이들이 형성한 일종의 행상조합이다.
부상청은 조선 건국과 함께 설치되었다. 설치 동기는 부상배(負商輩)들을 그들의 봉공진충(奉公盡忠)의 대가로 국가의 보호 하에서 육성, 신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부상청 설치 후 최초의 오도도반수(五道都班首)는 황해도 출신인 백달원(白達元)이었다.
그는 고려 말기 전국의 부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성계(李成桂)의 창업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부상 조합원은 정부의 보호를 받는 동시에 국가의 비상시에 수시로 사역(使役)되는 등 봉건적 관념에 있어서 정부에 대한 봉사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883년(고종 20)에 중앙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해 부상청과 보상단(褓商團)을 합해서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부속시켰다. 1885년에 혜상공국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보상을 우단(右團)으로 개칭하였다.
1894년에는 부상과 보상이 농상아문(農商衙門)의 관할 하에 소속되었고, 1897년에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황국협회(皇國協會)로 이속되었다.
1899년에는 상무사(商務社)로 이속되고 다시 이규항(李圭恒)이 통솔하는 진흥회사(進興會社)에 소속되었는데, 상무사로 이속되면서는 좌단을 좌사(左社)로, 우단을 우사(右社)로 개칭하였다.
1903년 공제소(共濟所)로 이관되어 그 뒤 다시 상민회(商民會)로 옮기고, 1904년 11월진명회(進明會)에 이속시켰으나 부진해 그 해 12월에 발족한 공진회(共進會)에 이속시켰다.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부상단과 보상단은 거의 소멸되고 지금 남은 것은 이른바 ‘저산팔읍(苧産八邑)’의 보부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