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5.26m.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 옆의 높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다.
지대석(地臺石)과 하층기단의 중석(中石)을 한데 붙여 8석으로 짜고 중석 각 면에는 2개의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그 사이에 2개의 탱주(撑柱: 받침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기단 갑석(甲石)은 윗면이 경사졌으며 그 중앙에 상층기단 중석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받침을 조각하였다.
상층기단중석은 각 면 1매씩의 판석을 세워서 짜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하나씩을 모각하였다. 상층기단 갑석은 2매의 장판석(長板石)을 남북으로 길게 덮고, 밑에는 부연(副椽: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만들고 윗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석으로 되었고 각 층 옥신에는 우주가 있을 뿐 조각은 없으며 처마는 수평이며 옥개받침은 각 층 5단인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복발(覆鉢: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신라중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하층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초층옥신석이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이에 비하여 옥개의 폭이 좁은 점은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비교된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옥신 중앙에서 얕은 방형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구(舍利具)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鐵製塔)·불상편(佛像片)·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