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원융국사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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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정면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정면
서예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원융국사 결응의 탑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경상북도
종목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유산(1979년 01월 25일 지정)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부석사경내 (북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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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원융국사 결응의 탑비.
내용

비신높이 1.73m, 너비 1.1m, 두께 15㎝.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으나 비신은 일찍이 도괴되어 아랫부분이 파손되었다.

원융국사 결응(決凝)의 탑비로서, 성은 김씨, 자는 혜일(慧日)로, 12세에 출가하여 복흥사(福興寺)에서 수계(受戒)하고, 28세에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정종 때 왕사, 문종 때에 국사가 되었다.

1041년(정종 7) 부석사에 들어가 신라 의상(義湘)이 전한 화엄법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문종 7) 4월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왕은 ‘원융(圓融)’이란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고청(高聽)이 짓고 글씨는 임호(林顥)가 썼다. 전액(篆額)도 임호가 썼다고 하는데, 고청이나 임호의 사적은 전하는 바 없다. 글씨는 자경(字徑) 2㎝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으나 좁고 긴 짜임새나 골격 위주의 수척한 획은 독특하다.

명문 중에 연호나 연대가 마멸되어 비의 건립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결응이 1053년에 입적하였으므로 대략 입적한 해이거나 다음해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한국미술전집(韓國美術全集)』 11 -서예(書藝)-(임창순 편, 동화출판공사, 1973)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3(조동원, 원광대학교출판국, 1982)
『朝鮮金石攷』(葛城末治, 國書刊行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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