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 청산리전투 등에서 전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만 일대에 대한 일본의 대반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가 그 기반을 잃고 시베리아 지역으로의 이동을 강요당하였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이후 독립운동단체간의 통일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에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도 민족운동상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지선(東支線)에 있는 조선인청년연합회·동일청년연합회(東一靑年聯合會)·아성청년회 외 5개 단체가 연합해 1926년 5월 10일 이 단체를 창립하게 되었다.
준비위원으로 김동식(金東植)·이한산(李漢山)·박석홍(朴錫弘)·강화인(姜化仁)·최동욱(崔東旭)·손효준(孫孝俊)·주동진(朱東鎭), 상무위원으로 주동진·김동식·최동욱을 선임하였다.
동시에 ① 계급적·조직적 단결과 청년운동의 통일을 촉성하고 혁명전선에 참가해 군중의 훈련·교양을 행할 것, ② 모순된 현사회를 타파하고 합리적 사회를 건설할 것, ③ 조선민족의 해방과 혁명 수행을 기약할 것 등의 강령 아래 국내의 화요회계(火曜會系) 공산주의자와 제휴하였다.
그 뒤 주요 간부의 이탈로 본거지를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기고 어렵게 명맥을 유지, 재중국한인의 총괄 기관이라 자칭하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에도 가맹하였다. 이 때 1928년 5월 중순 정의부(正義府) 중심의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에서 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개최하였다.
그러자 이 단체에서도 간부 황기찬(黃基贊)·이명도(李明道)를 파견해 개인 본위의 유일당조직을 주장하는 촉성회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회는 중앙집권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일당의 조직이 불가능하다며 탈퇴하였다.
그리고는 송강(淞江)·동만(東滿)·남만·합장(哈長)·여족공의회(麗族共議會) 등 7개 단체와 민족유일당촉성조직동맹이라는 별개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뒤 중앙집행위원장 김유성(金有聲)과 경상북도 영천 출신 김은한(金殷漢) 외에 간부 1인을 중심으로 세포단체 18맹원 300명으로 하여 북만주의 유력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기관지로 『농군(農軍(』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