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이자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말기 또는 중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표지유적(標識遺蹟)으로 중요하다. 1998년 12월 2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고산리 자구내의 해안가 남쪽 대지상에 위치한다. 이 일대는 제주도 해안지역에서 보기 드문 너른 들판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 밭과 논이 크게 발달되어 있다. 속칭 ‘한장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적의 북서쪽으로는 해발 148m의 당산봉(唐山峰)이라고 하는 바위산이, 남동쪽으로는 해발 65m의 수월봉(水月峰)이라고 하여 오름이 해안절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에는 수천 평에 걸쳐 다량의 석기와 토기파편이 산포되어 있다. 해안가이면서 패총 유구를 갖고 있지 않은 점은 남해안지역의 비슷한 시기의 유적인 상노대도(上老大島) 등의 초기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사하다.
1988년과 1990년에 걸쳐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석촉 등의 석기가 채집되었다. 1988년 유적을 지나는 해안관광도로 확장공사 때 구제발굴과 1996년 정식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 결과, 유물포함층은 해안절벽쪽으로 갈수록 더욱 두터워져 1m 남짓되며, 하천쪽으로 가면서 점차 얇아져 30cm 내외가 된다. 크게 표토층, 흑색부식토층, 황갈색점토층, 황갈색 생토층의 4개 층위로 구성된다.
유물은 흑색부식토층과 황갈색점토층에서 주로 출토된다. 두 층간의 확실한 시기적 차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유적에는 집터나 성격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구덩이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그 중 1994년에 조사된 구덩이 하나는 길이 2m, 폭 1m, 깊이 50cm의 장방형 유구로 검게 탄 재층이 많았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것이 일본 죠몬(繩文)시대 조기(早期)와 초창기에서 확인된 바 있어 일종의 화덕시설로 추정된다. 1997년 조사에서는 석기제작장소로 판단되는 유구(遺構)와 기둥구멍일 가능성이 있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크게 2종이 있다. 한 형식은 이른바 융기문토기로 1988년에 해안가 절벽 바로 위 경비참호에서 1m 이하의 퇴적층에서 수집된 1개체분이다. 평평바닥에 광구대발형(廣口大鉢形)으로 구연부(口緣部)에 3줄의 굵은 융기대문이 돌아가는데 파상곡선문을 이루고 있다.
유적발굴을 통해 확인되는 대부분의 토기편은 식물줄기와 같은 섬유질 보강제를 섞어 성형해 소성한 뒤 그 자국이 남아 있는 토기이다. 또 다른 형식도 직립구연에 평저이며 융기문토기와는 달리, 점토질이 강하다. 양자의 공반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형식의 토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섬유질의 토기형식은 연해주(沿海州)와 일본의 신석기시대 초기 또는 죠몬 초창기 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다. 석기 중 완성형 석기는 1997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면적 대략 1,500㎡에서 1,000여 점이 나왔다.
그 구성을 보면, 화살촉, 긁개·자르개·새기개·뚜르개·톱니날·양면석기·홈날 등이 있다. 화살촉은 700여 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길이 3cm 미만으로 형식이 다양하다. 슴베가 없는 삼각형식, 슴베가 있는 형식, 촉신 하단의 둥글거나 뾰족하게 마무리 된 형식 등이 있다.
이들 석기와 공반된 석재로서 몸돌곽 돌날, 격지도 다량 수습되었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이 유적에서 좀돌날이 만들어졌음을 입증해주는 좀돌날과 그 몸돌이다.
이들은 시베리아 남부와 일본에서 확인되는 좀돌날 또는 세석린(細石刃) 몸돌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중석기 또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석기제작 전통이 고산리 유적의 단계에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절대연대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제2층에서 일본의 가고시마현(鹿兒島縣) 유황도(硫黃島)의 귀계(鬼界) 칼데라에서 날라 온 아카오야 화산재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서기전 6,300년경 이전에 유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좀돌날석기와 식물줄기 혼입의 토기가 대체로 일본과 연해주에서 1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초기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고산리 유적의 연대도 대체로 이와 같으리라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