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

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동탁
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동탁
선사문화
유물
청동기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방울소리를 내는 청동제 의기(儀器) 또는 말종방울[馬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탁은 청동기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방울소리를 내는 청동제 의기(儀器) 또는 말종방울[馬鐸]이다. 원뿔대를 옆에서 누른 모양으로 단면은 은행알 모양이고 윗면에 반원형 고리가 달려 있다. 청동기시대의 동탁은 길이가 7-8cm 내외이며, 거치문대(鋸齒文帶)가 장식되어 있다. 종교의식과 관련된 각종 의기와 함께 발견된 사례로 보아 솟대같은 곳에 매달았던 방울로 추정되는 9cm 이상의 동탁도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동탁을 통한 의기문화의 형식학적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로서 가치가 크다.

목차
정의
청동기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방울소리를 내는 청동제 의기(儀器) 또는 말종방울[馬鐸].
내용

몸집 전체가 원뿔대를 옆에서 누른 모양으로 단면은 은행알모양이고, 윗면에 반원형 고리가 달려 있다. 동탁의 겉면에는 외형(外型)과 내형(內型)의 거푸집(鎔范)을 연결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측면 양쪽과 상면 양쪽에 나 있다. 크기에 따라 높이가 9~14㎝ 정도의 것과 5㎝ 미만의 두 종류로 나뉜다. 대체로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의 동탁이 20∼30㎝ 높이의 대형인데 비해, 한국의 동탁은 전부 15㎝ 미만의 소형이다.

동탁(銅鐸)은 중국 고대문헌에는 ‘령(鈴)’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토된 예는 청동기시대의 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마포흔(麻布痕)이 붙어 있는 상태로 출토된 것이다. 은주(殷周)시대에는 말 장식인 마령(馬鈴)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동탁은 청동기시대에 출현하여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걸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삼국시대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청동기시대의 동탁은 요녕 여대시 루상(樓上), 함북 나진 초도(草島), 함북 북청 토성리(土城里)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함남 금야읍(金野邑)에서는 거푸집도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다소 작아 7-8㎝ 내외이며, 위 아랫단에 거치문대(鋸齒文帶)가 장식되어 있다.

초기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걸쳐 무덤에서 발견된 동탁으로는 금강 유역의 대전 괴정동(槐亭洞), 부여 합송리(合松里) 등과 경주 입실리(入室里), 대구 평리동(坪里洞), 신천동(新川洞), 그리고 대동강 유역의 정백동(貞柏洞), 석암리(石巖里),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 운성리(雲城里) 등의 출토 예가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관계 유적에서 발견된 동탁은 대부분이 9∼15㎝ 크기이다. 이것은 삼국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5㎝ 미만의 동탁처럼 말종방울로 사용되었으리라고 보기에는 큰 편에 속한다. 오히려 대전시 괴정동에서 종교의식과 관련된 각종 의기와 함께 발견된 예를 보아 역시 의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이것을 솟대같은 곳에 매달았던 방울로 보는 설도 있다. 의기로 생각되는 동탁은 겉면에 아무런 무늬장식이 없고, 대체로 9㎝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 예로는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2개를 비롯해, 평안남도 대동군 오야리고분에서 4개, 용악면 상리에서 3개,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에서 2개, 대구 평리동에서 4개, 경주 입실리에서 2개, 평양 정백동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에서 12개, 그 밖에 평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1개 등이 있다.

한편, 후기 세형동검 유적에서도 말종방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5㎝ 내외의 작은 동탁이 발견되었다. 이 말종방울은 앞뒤 겉면에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고, 아래 끝이 움푹하게 곡선을 그리며 패어 있는 것이 앞서의 동탁과는 형태상 차이가 있다.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와 경주 입실리의 출토유물이 대표적이다. 특히, 운성리 출토품은 흔들면 소리를 내게 하는 말종방울 안쪽의 쇠붙이로 오수전(五銖錢)이 매달려 있어 그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최근에 발견, 조사된 경주 조양동 구덩무덤 유적에서도 말종방울 1개가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탁의 사용연대를 볼 때, 먼저 의기로서의 동탁은 대전 괴정동의 초기 세형동검 유적 출토품이 서기전 4세기 말∼3세기 초로 가장 오래된 예이다. 운성리 유적은 오수전을 기준으로 할 때, 서기전 1세기 중엽경의 가장 늦은 예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기전 4, 3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가 그 사용연대로 생각된다. 말종방울로서의 동탁은 운성리 · 입실리가 가장 빠른 예로서, 서기전 1세기 중엽경에 해당된다. 그 뒤 조양동 유적 등의 예를 거쳐 삼국시대에까지 계속 이어져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동탁은 점차 의기적 성격에서 실용적 성격으로 변모해갔으며,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동탁을 통한 의기문화의 형식학적 변화과정을 통한 선사와 고대문화의 흐름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한국의 청동기문화』(국립중앙박물관, 1993)
「한국청동유물의 연구」(윤무병, 『충남대학교 인문과학논문집』Ⅱ·3, 1975)
「초도 유적의 주인공에 관하여」(도유호, 『문화유산』1, 1960)
「나진초도 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유적발굴보고』1, 1956)
『朝鮮發見銅鐸の集成』(榧木龜生, 1936)
집필자
이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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