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학당이 소실되고 학생수가 격감되어 사학(四學)의 교육활동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그 재건을 위하여 제정되었다.
이 규제의 주요내용은 교수관(敎授官)의 장학지침과 사학유생의 초시 응시규정에 관한 것이다. 학관(學官)과 겸교수(兼敎授)는 학생들의 학업태도를 감독하고, 강송(講誦)·제술(製述)에 우수한 자를 선발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정수를 4인 증원하여 사부(士夫)와 평민의 자제들을 모두 가르치게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소학』의 시험결과에 의하여 생원초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한편, 강송과 제술에 뛰어난 사학생도를 선발하여 생원·진사의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진흥책에도 불구하고 사학은 시설의 부족, 기본재산의 부족, 학생들의 무관심 등으로 인하여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