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삼화동의 철광산인 삼화광산의 광상은 조선누층군에 속하는 석회암 지대와 Ca-형 주1 철광상으로 형성되어 있다. 삼화광산에서 철을 캐던 동굴은 지금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938년 7월 한반도로 이주한 고레가와 긴조[是川銀藏]는 미츠비시광업[三菱鑛業]과 조선총독부 지질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광업 개발 지식을 익히면서 철광산 탐사에 나섰다. 철광산 개발을 위해 12명의 자본가를 동원하여 ‘조선광업개발조합’을 결성하였다. 1939년 3월 동해시[당시 삼척군 북삼면]에 있는 철광산 2개 광구의 광업권을 이전받았으며 1940년 삼화철산 사무소를 설치하고, 동철광 2.95㎢와 철광산 2.85㎢에 대한 광업권도 설정하였다. 1941년 금은 철광산 1.95㎢, 1942년 북삼면과 미로면에서 3.14㎢과 2.64㎢의 철광산 3건의 광업권을 설정하는 등 철광산 규모를 확대하였다. 동해시 일대의 철광은 ‘조선삼화광산’이었는데, 1916년에 등록된 철광과 1917년에 등록된 철광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매수한 철광산이었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해마다 철광산의 광구가 등록되었다.
일제강점기 연산 5만 원 이상의 철광산으로는 삼화광산을 비롯하여 은율광산 · 재령광산 · 개천광산 · 겸이포광산 · 하성광산 · 은룡광산 · 수광산 · 양양광산 · 이원광산 · 무산광산 정도에 불과하였다. 1941년 본격 개발에 들어간 삼화광산의 생산액은 11만 2534원으로 무산광산의 693만 1815원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동해시 일대는 오사카와 연결하는 수송선박이 드나드는 묵호항을 구축하고 있어 조선총독부는 삼화광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1942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용광로를 갖춘 제철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전쟁 수행을 위해 철광 자원 개발이 필요한 실정이어서 삼화철광산 개발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1943년엔 제철 사업을 놓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분쟁이 발생하면서 고레가와는 제철 회사를 설립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삼화광업을 운영하였다. 고레가와는 삼화광업 취체역으로 등기하였다. 삼화광산의 소유권은 조선광업개발조합 대표 오무라 마츠타로[大村松太郞] 등 12명이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1940년대 삼화광산의 등록 광구는 9개로 19.14㎢에 달하였으며, 노동자 2,200명이 연간 100만 톤을 생산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에 귀속된 고레가와제철은 삼화제철공사로 개명하여 국영기업으로 운영되다가, 1958년 민간인 설도식[범한무역]에게 불하되었다. 1961년 삼화제철소 제3용광로 기화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하여 불을 붙이는 기념식을 진행할 정도로 국가에서도 관심이 지대하였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존재 가치를 잃은 삼화제철은 1970년 가동을 중단하였다.
1993년 삼화제철소의 고로 8기를 철거할 때 마지막 고로는 포스코가 인수하였다. 포항시 남구의 포스코역사관 야외 전시장에서 2003년부터 웅장한 규모로 전시되는 고로가 삼화제철소의 고로이다. 하루 생산능력은 20톤에 불과하였지만, 현존하는 고로 중 가장 오래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국가등록문화유산[포항 구 삼화제철소 고로]으로 지정되었다.
한편, 동해시에서는 송정동 일대에서 발견된 쇠삽날과 쇠화살촉 등의 철기류 유물과 철기시대의 마을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철기시대의 역사 유적에서부터 삼화광산과 삼화제철소의 근대 유산이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남한 지역 최초의 제철소인 삼화제철소와 그에 공급하는 삼화광산은 한국 철광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