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1.88m, 너비 0.97m. 점판암으로 화강암의 부석(趺石) 위에 섰으며 이수(螭首)는 없다. 제액(題額)은 ‘贈諡玄悟國師碑銘(증시현오국사비명)’의 8자로 자경(字徑)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자경 3.3㎝의 해서(楷書)이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僧)으로 이름은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다. 인종이 일찍이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여풍(餘風)을 이을 사람이 없음을 두려워하였으나, 마침내 현오가 뒤를 이어 나이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고 1147년(의종 1) 이후 수좌(首座)가 되었다.
1178년(명종 8) 나이 53세(法臘 39세)로서 시멸(示滅: 고승의 죽음)함에 왕이 심히 슬퍼하여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에 봉하고 시호를 현오라 하였으며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毘)하게 하였다.
비의 설립 연대는 대정(大定) 25년, 즉 1185년(명종 15)이며, 문인 등이 서봉사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찬자(撰者)는 이지명(李知命), 서자(書者)는 유공권(柳公權)이다.
탑비의 조형은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보물, 1963년 지정),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물, 1963년 지정)에서와 같이, 윗변의 양각(兩角)을 귀접이(물건의 귀를 깎아 둥글게 하거나 접어 붙이는 일)한 규형(圭形)이고, 지대석(地臺石)도 4변을 접은 간략한 것으로서, 개석(蓋石)과 여러 조식(彫飾)을 생략한 고려 말 석비의 새 계류를 형성하는 좋은 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