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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국난 이후 향토 부흥에 헌신한 의병장.
이칭
  • 명암(銘巖)
  • 청지(淸之)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임진왜란|이괄의 난
  • 본관달성(達城)
  • 사망 연도1644년(인조 22)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561년(명종 16)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장희 (성균관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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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국난 이후 향토 부흥에 헌신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봉사(奉事) 서충립(徐忠立)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르는데 가례(家禮)를 준수해서 사람들이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자 어머니가 소생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병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운봉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을 찾아가 의병활동을 주장하자 남간이 공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공이 이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 수천명을 모아 황산(荒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또다시 천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연속되는 국난으로 고을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마을의 뜻있는 노인들과 향약 7조를 제정하고 사재를 털어서 향토부흥에 헌신하였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과 엄계서원(嚴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 『황고집(黃皐集)』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여지도서(輿地圖書)』

  • - 『백수집(白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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