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김해부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을 버리고 숨어있다가 살해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93년(선조 26)
주요 관직
김해부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진주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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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김해부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을 버리고 숨어있다가 살해된 무신.
개설

고조는 동복현감(同福縣監) 서운(徐運)이고, 증조는 하동현감(河東縣監) 서백(徐백)이며, 할아버지는 주부(主簿) 서관(徐瓘)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회령의 보을하진첨절제사(甫乙下鎭僉節制使)로 정탐의 임무를 띠고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 땅에 깊이 들어갔으나 80여 명의 부하를 모두 잃고 패주한 죄로 종성(鐘城)에 수감되었다.

그 뒤 석방되어 김해부사로 있을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수비하던 중 적이 보리를 베어다가 성의 높이와 같게 쌓고 쳐들어오자 패주하였다. 그 뒤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의 왜적을 격퇴하고, 1차 진주성싸움에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왜적과 항전하였다.

김시민이 병으로 죽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에게 발탁되어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적이 재차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성을 버리고 숲속에 숨어 있다가 살해당하였다.

본래 힘은 세지만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무장으로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형 서인원(徐仁元)이 명사(名士)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요지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징비록(懲毖錄)』
『쇄미록(瑣尾錄)』
『서애집(西厓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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