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국보(國寶). 서성(徐渻)의 현손이며, 제조(提調) 서경주(徐景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정리(徐貞履)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서문유(徐文裕)이며, 어머니는 이홍적(李弘迪)의 딸이다.
1721년(경종 1)에 진사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보임된 뒤, 삼척부사·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을 역임하였다. 어가(御駕)를 따라 온양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가 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목사까지 지냈다. 56세 되던 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771년(영조 47) 박필순(朴弼淳)이 청나라 사람 주인(朱璘)이 쓴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입수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태조와 인조에 관련한 서술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영조에게 보고하였다. 영조는 종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 파견을 명하는 한편, 『명기집략』에 찍혀있는 도장의 출처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서종벽의 것이었다. 이 일로 서종벽은 생전의 관작을 추탈당하였지만, 2달 후에 처벌이 보류되었다. 순조 대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