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조선후기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전투에서 전사한 7인 관련 무덤.
내용
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롯하여 이정익(李廷翼) · 한호성(韓好成) · 양응록(梁應祿) · 고정철(高貞喆) · 오종(吳琮) 등이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화엄사의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석주관에 집결, 왜병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 나무를 베고 바위를 옮겨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다. 당시 죽은 왜적들로 인하여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하여 이 때부터 이 고장에 ‘피아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하동으로부터 큰 무리의 왜병이 쳐들어왔다. 의병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1805년(순조 5) 조정에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다. 그 뒤 1946년 지역의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현재 구례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석주관터 길목 왼편에 칠의사의 묘소와 추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문화유적총람』하(문화재관리국, 1977)
- 『구례군지』(구례군, 1969)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