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석주관은 전라남도 구례와 경상남도 하동을 잇는 지리산의 요새로, 임진왜란 직후에 호남의 안전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 정유재란 당시 수만 명의 왜병이 들이닥치자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해서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롯하여 이정익(李廷翼) · 한호성(韓好成) · 양응록(梁應祿) · 고정철(高貞喆) · 오종(吳琮) 등이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화엄사의 승병 153명의 지원을 받아 석주관에 집결, 왜병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 나무를 베고 바위를 옮겨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다. 당시 죽은 왜적들로 인하여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하여 이 때부터 이 고장에 ‘피아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하동으로부터 큰 무리의 왜병이 쳐들어왔다. 의병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1805년(순조 5) 조정에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다. 그 뒤 1946년 지역의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 의사들의 공훈을 추모하였다. 현재 구례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석주관터 길목 왼편에 칠의사의 묘소와 추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