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5 거성(去聲) 대(隊)조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성임(成任)의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는 ‘최치원’으로 되어 있다. 또 중국 남송 때의 장돈이(張敦頤)가 편찬했다는 『육조사적유편(六朝事迹類編)』의 분릉문(墳陵門) 제13에는 ‘쌍녀분(雙女墳)’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태평통재』에 수록된 내용은 『대동운부군옥』의 수록 내용에 비하여 훨씬 내용이 길 뿐만 아니라 문학화되어 있어 설화보다는 소설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마도 중국 현지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최치원과 쌍녀분’에 관한 전설이 『육조사적유편』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바탕으로, 『대동운부군옥』 수록분과 같은 기록문학 작품으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태평통재』 수록분과 같은 단편소설로까지 승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갔을 때 초현관(招賢館)에서 놀았는데, 그 앞 언덕에 ‘쌍녀분’이라는 오래 된 무덤이 있어, 그 석문에다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그 뒤 갑자기 손에 홍대를 쥔 여자가 최치원에게 와서 “팔낭자와 구낭자가 화답하여 삼가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최공이 깜짝 놀라 그 낭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여자는 말하기를 “공께서 아침에 시를 지으셨던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홍대를 받아 보니 두 낭자가 화답한 시가 들어 있었고, 뒷폭에는 한 번 만나기를 청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공이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 했다. 공이 또 시를 짓고, 끝에다 역시 만나자는 내용을 써 취금에게 주어 돌아가게 했다. 한참 후 한 쌍의 구슬 또는 두 송이 연꽃과 같은 두 여자가 나타났다. 공이 두 여자를 맞아 근본을 물으니, 두 여자가 들려주는 내력은 이러했다.
그들은 원래 부호인 장씨집의 딸들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 때에 각각 소금장사와 차장사에게 시집가기를 부모가 권유하였다. 그러나 자매의 마음에 차지 않아 울적한 마음이 병이 되어 마침내는 요절하였는데 다행히 최공과 같은 수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는 오늘 같은 좋은 밤에 시나 지으며 즐기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시를 짓자 이어 두 낭자가 차례로 시를 지어 읊었다. 마침내 그들의 간 곳은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태평통재』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는 거의 같으나 「선녀홍대」에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은 시들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또 작품 말미에 남녀 주인공들이 하룻밤을 동침하고 나서 이튿날 새벽에 작별한 뒤 최공이 다시 쌍녀분을 찾아가 지난 밤 일을 회상하며 장가(長歌)를 불렀고, 그 뒤 신라로 돌아와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렸다는 「최치원」의 내용이 없다.
이 설화는 당나라 때의 전기소설인 장문성(張文成)의 『유선굴(遊仙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자와 사자와의 교정(交情)이 중심 모티프이고 산문 작품 속에 삽입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 하는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중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등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