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이다. 1908년 11월 최남선(崔南善)에 의하여 창간되었으며,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최창선(崔昌善)이며, 신문관(新文館)에서 발행하였다.
최남선이 1906년 재차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지력과(地歷科)에 적을 두고 있었을 때에 학생 모의국회의 토의안건이 문제가 되어 조선학생 70여 명이 동맹퇴학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당시 19세의 최남선은 남은 학비로 인쇄기구를 구입, 귀국하여 이 잡지를 간행하였다.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창간호)라는 발간취지를 내세우고 처음에는 혼자서 집필과 편집, 발창간호의 독자는 6명, 2호 14명, 8·9호까지 30명, 1년이 지나서 200명을 넘지 못하였다.
3권 2호부터 비로소 개인 잡지의 성격을 벗어나 이광수(李光洙)·홍명희(洪命熹)가 글로 가담하였고 8호에 이르러서 발매금지와 정간을 당하였다. 3개월 만에 해금(解禁)되어 1910년 12월 3권 9호로 속간되고, 1911년 1월에 4권 1호, 4개월 만인 1911년 5월에 4권 2호(통권 23호)로 다시 발행정지를 당하였다.
「편집실 통기(通寄)」(창간호)에 “본지는 어디까지든지 우리 소년에게 강건(剛健)하고, 견실하고 궁통(窮通:성질이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는 일)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고로 결코 연약(軟弱)·나태·의지(依持)·허위의 마음을 자극할 듯한 문자는 조금도 내지 아니할 터이오. 그러나 미적 사상과 심신훈도(心神薰陶)에 유조(有助)할 것이면 경뢰(輕賴)한 것이라도 조금조금 게재하겠소.”라고 편집 방침과 그 성격을 밝히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소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계몽에 중점을 두고 엮어졌다.
특히 최초의 신체시(新體詩)인 「海에게서 少年에게」(창간호)를 게재하는 등 신문학 초창기에 남긴 문학사적 공헌도 지대한 바 있다 할 것이니, 『청춘(靑春)』과 더불어 『창조(創造)』·『폐허(廢墟)』·『백조(白潮)』 등 순문예동인지가 나오기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의 잡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