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徐哲)·최현길(崔賢吉)·이명선(李明善)·신태현(申泰鉉)·곽경(郭敬) 등이 상해에 본부를 두고 북간도를 비롯해 서간도·팔면둔(八面屯)·하얼빈·길림 등 만주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목적은 폭탄을 제조해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달성하는데 있었다.
이 단체의 조직과 단원수를 보면, 단장 서철의 상해본부에 단원 약 500명, 단장 전일(田一)의 니콜스크지부에 단원 약 200명, 북간도지부에 단원 약 300명, 단장 최현길의 서간도지부에 단원 약 350명, 단장 이명선의 팔면돈지부에 단원 약 50명, 단장 신태현의 하얼빈지부에 약 100명, 단장 곽경의 길림지부에 단원 약 30명, 치타시지부에 단원 약 200명 등으로 모두 1,730명에 달하였다.
길림소년단은 여준(呂準)을 단장으로 하는 급진단과 병합하기도 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도 결사구국을 목적으로 회장 정창선(鄭昌善), 부회장 김운학(金雲鶴)을 중심으로 한 42명의 단원이 있었다.
만주와 포염(浦鹽 :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대한소년독립단에서는 1919년 7월 취지서를 발표하고 결사대를 결성해 독립이 달성될 때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국내 소년단인 한국남녀소년단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했고, 7월에는 조병철(趙炳喆) 등의 발기로 원산한국소년단이 조직되었다.
이로 보아 상해소년단이 조직되기 전에 이미 소년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내의 소년단은 1922년 2월 서울 경운동 천도교회당에서 마상규(馬湘圭) 등의 발기로 조선소년단 창립취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같은 해 9월 종로에 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척후 제1호대가 조직되면서 국내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7년 9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소년단 총본부와 58계호대는 해산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