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신은 점, 금기, 민간요법, 주법 등 민간에 통용되는 종교 관습이다. 속신은 인과론적인 주술심리, 감염원리, 유사원리 등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고 체계이다. 그 사고 체계는 나아가 행동의 체계까지 유발한다. 속신은 흔히 속담이나 격언 따위와 같은 언어적 진술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하면 ……다.” 또는 “……하면 ……하게 된다.”와 같은 형식이다. 이 표현에는 비판 의식이나 가치판단, 그에 따르는 교훈성 등은 문제 되지 않는다. 속신은 한 전통사회가 자연과 사회, 사물과 인간을 연관 속에서 관찰하고 인식하고 해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민속신앙의 준말이 아니며, 또한 민간사고와도 별개의 개념이다. 민속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비교적 근자에 관심을 모은 새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folk-belief ’의 역어(譯語)이다. 인과론적인 주술심리를 비롯해서 감염원리 또는 유사원리의 주술심리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고의 체계이면서 그 체계는 나아가 행동의 체계까지 유발한다. 주술적 함축성이 있는 속신을 신성 속신이라 부를 수 있는데, 세속적인 속신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의 사고체계라고 할 때, 흔히는 이른바 ‘민간사고’가 연상되는데, 민간사고는 오히려 민간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종합적인 관념의 체계, 사상의 체계이다. 민속의 모든 영역이 하나하나 그물의 코같이 얽히고 설켜서 마련한 결과에서 비로소 민간사고는 추출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종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신은 신성한 경우나 세속적인 경우를 가릴 것 없이 그것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한 토막의 사고체계요 행동의 지침이다.
속신은 흔히 속담이나 격언 따위와 같은 언어적 진술로 이루어지는데, 언어적 진술로서의 속신과 속담의 친근성을 따로 양자가 한 언어표현에 겹쳐질 정도로 큰 것이다. 가령 ‘벼락은 한곳에 두 번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어서 무슨 행동을 취하는 지침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속신과 속담의 구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명제를 재변이나 어려움은 잇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 말하자면 화불단행(禍不單行) 따위와는 매우 상반된 낙관적인 처세훈으로 풀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담의 테두리 속에 머물고 만다.
속담이 교훈적인 데 비해 속신은 직접 행동의 지침이 되어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동을 유발한다. 즉, 한번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되돌아가서 웅크리고는 벼락을 피할 생각을 하게 되면 속신은 그 본령을 나타내게 된다.
이 경우, 속담이 은유적 · 풍유적(風喩的)인 데 비해 속신은 직설적이다. 그러나 속담과 속신이 끝까지 한가지 언어진술의 해석 여하에 따라 결정지어진다면, 속담이나 속신이 자율적으로 혹은 내재적으로 규정지어지지 못하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중의적(重義的)인 모호성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해석하는 사람의 자의로 속담과 속신이 끝까지 구분된다면 주체성을 지닌 속담이나 속신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속신의 언어적 진술체가 지닌 자율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속담은 ‘세살 먹은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예가 보여주듯, 주어부 하나와 서술부 하나로 엮어진 매우 단순 · 간결한 언어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간결성에 비해 비유적 함축성이 큰 것이 또한 그 특색이다. 비유적 함축을 지닌 간결한 언어 진술체로서 속담은 존재하고 있다. 비판적이고, 때로 야유나 조롱의 투가 진하게 깔려 있기도 하다. ‘우물가서 숭늉 달랜다.’나 ‘벼락에 콩 구워 먹기’ 등은 조롱하는 투의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비판적인 만큼 처세훈이나 교훈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국어의 속담 가운데에는 바로 앞의 두 보기처럼 주어부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주어부는 속담이 쓰이고 있는 맥락(脈絡, context)에 따라 속담이 주어지고 있는 수신자(受信者)인 경우와 보편적으로 인간 누구나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인간행위의 가치판단, 관념적 마무리 등에 쓰일 수 있는 속담은 인간적 결함을 지닌 사람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결함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속담의 융통성이 그만큼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와 같이 주어부와 서술부가 두개씩 있는 명제의 경우에도 단일 명제가 대등하게 겹쳐진 중문에 불과하다. 또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와 같이 대구표현의 속담이 존재하고 있다.
한편, 속담이 언제나 교훈을 더불어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꿩 구워먹은 자리’와 같이 사실을 적절하고 간명하게 묘사하거나 지적함으로써 언어 진술체로서의 감동적인 효율성을 발휘하는 속담도 있기 때문이다. 속담의 언어적 특색이 사실판단과 비판을 그 주된 기능으로 하는 명쾌 · 간결한 은유적 함축성이 큰 평서문이나 권유문이라는 데에 있다면, 속신은 큰 예외 없이 가언명제(假言命題)로 이루어져 있는 간명한 언어 진술체라 말할 수 있다.
즉, 속신은 “……하면 ……다.” 또는 “……하면 ……하게 된다.”와 같은 언어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설적 · 가정적인 전제가 있고 마무리짓는 결론부가 여기에 따르게 된다. 그것이 중문 아닌 복문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종속문 하나와 주부 하나로 이루어진 언어 표현체가 곧 속신이다. 이 표현체에는 비판의식이나 가치판단,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교훈성 등이 문제되지 않는다.
주부는 언제나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면 ……다.”일 때라도 “……다라고 믿는다.”가 함축되어 있고 “……하면 ……된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된다고 믿는다.”를 언외(言外)에 풍기고 있는 것이다. 속신은 믿음을 함축한 가언명제로 이루어진 언어적 진술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속신에서 그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세속적인 속신의 경우는 단순한 신뢰일 수 있으나, 신성 속신의 경우는 종교적 · 주술적 신앙인 경우가 흔하게 나타난다. ‘아침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고 할 때, 기다림이 절박한 경우 그 믿음은 한결 짙어질 것이다. 가령 ‘아침 거미를 보면 재수가 있고 저녁 거미를 보면 재수가 나쁘다.’라는 속신의 경우, 저녁 거미에 관한 부분은 자칫 편집광적인 믿음을 유발하게도 된다.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한 대상의 ‘상징화’와 밀착하게 된다. 이럴 경우, 특히 흉조와 관련되어 사물을 금기화하기까지 한다. ‘까마귀 울면 초상난다.’라고 해서 까마귀를 쫓는다든지, ‘거울에 금가면 부부금실에 금간다.’라고 하면서 깨어진 거울을 두고 불안해하는 경우들이 그 좋은 보기들이다.
이상의 실례들이 암시하고 있듯이, 가언부는 징후나 조짐을 나타내고 있고, 종결부는 조짐 · 징후의 풀이 ·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속신이다. 곧 ‘징후+판단(믿음)’으로 속신의 언어적 진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속신은 매우 단순한 ‘점치기’와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징후와 징조의 해설은 전통과 관습에 의해 굳어져 있어, 해석이 굳어져 있는 유사 점치기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한 대상이 상징화를 거쳐 징후로 굳어지기까지 전통과 습속이 관여하게 되고, 그런 한도 안에서 속신은 민간전승에 기대어 있게 된다. 징후는 길조와 흉조로 나뉘어져 있다. 모양이 괴기한 것, 낡아서 허물어진 것, 추악한 느낌을 주는 비정상적인 것,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것, 불구 · 검정색 따위의 어둡고 칙칙한 빛깔 등이 대체로 흉조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구태여 자연물과 인공물을 이 경우 구별할 필요는 없다. 이에 비하여 밝고 깨끗한 빛깔, 심미감을 자극할 만한 것, 어리고 발랄한 것 등은 길조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길조 · 흉조의 이원적 대립성은 까마귀울음과 까치울음, 저녁거미와 아침거미의 대립에 잘 비쳐져 있다. 거미의 경우는 동일대상을 두고도 아침과 저녁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하나의 대상이 같은 가치라기보다, 그 대상이 등장하는 맥락의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대상이 그 모양이나 빛깔 등에 따라 전혀 상반된 해석을 지닌 징후로 간주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령, 정월대보름날에 마을 앞산에서 달을 두고는, 그 위치 · 방향 · 빛의 진하고 옅음 등에 따라 그 해석이 서로 다른 징후로 계산되는 것이다.
달, 그것도 대보름달에 관한 속신은 풍요원리와 맺어져 1년 동안의 풍요와 흉년들기를 미리 점치는 행위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농사점 내지 ‘농점(農占)’인 것으로, 일년 열두 달의 농사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를 앞질러 점치고, 또 그에 대응한 방편을 취하게 되는 만큼 대보름달의 속신은 ‘운수(運數)의 제의(祭儀 : Feast of Fate)’를 형성하게 된다. 달의 모양 · 빛깔 · 방위 등에 따라 열두 달, 달마다의 농사 운이 점쳐지는 것이다.
대보름의 속신으로는 이 밖에 ‘화적(禾積)’이 있다. 수숫대에다 12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다 곡식낟알(콩이나 팥 따위)을 넣은 뒤, 물에 담갔다가 꺼내서는 낟알이 부푼 정도에 따라 열두 달의 풍요와 흉년을 점치는 것이다. 낟알 12개가 각기 열두 달에 대응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만큼 농사점 구실을 한 속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험부담이 컸던 어촌에는 또 어촌대로 바람 · 구름 · 물빛 등에 따른 속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경우는 ‘민간 기상학(氣象學)’ 구실을 겸하여 경험과 귀납적 추리에 기댄 ‘민간과학’을 형성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람을 강한 정도 · 빠르기 · 방향 등에 따라 세분하고 그 숱한 종류의 바람 따라 항해의 위험도와 안전도, 그리고 어획의 다소를 점치면서 그것을 생활전통으로 삼아 왔던 것이다. 농어촌을 통틀어 자연현상 · 자연사물들이 속신의 징후군을 이루고, 주민들은 그 징후군의 그물에 싸여서 생활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연관과 세계관에서 유추된 작은 단위의 믿음이었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이 쓰기를 기피하는 미신이라는 말로 한때 이 모든 속신을 처리하러 들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속신을 작은 점치기라고 볼 때, 징후와 해석 사이, 즉 가언명제와 종결부 사이를 엮는 매듭은 결코 단일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 ‘인과의 매듭’으로 구름과 비, 바람과 파도 등은 비교적 쉽게 자연관찰에서 얻어지는 인과의 매듭일 수 있었을 것이다. 특정한 곤충과 파충류의 이동이나 울음이 기상조건의 변화를 암시하는 징후로 해석되었을 때, 그것이 경험론적인 인과론에서 유래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비유법의 매듭’으로, 가령 해묵은 고목에서 새 움이 튼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새 왕조의 탄생으로 간주된 사례가 있거니와 이 경우 고목이 해묵은 왕조, 새 움이 신흥할 왕조에 견주어진 것이다. 물론 이같이 고목과 그 새 움이 해석된 것은 일단 일관(日官)의 판단이나 보증을 거쳐야 하였다. 그런 뜻에서 일관은 관변(官邊)의 속신 해석자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목과 그 새 움이 위와 같이 해석된 나머지 새 왕조의 창시자가 될 것으로 일관에 의해 지목된 젖먹이가 색출되어 죽음을 당하는 극단적인 사례가 중국 왕조사에 보이고 있다. 은유법의 매듭에 유사원리의 주술적 심리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서적 반응의 매듭’으로, 우리들에게 쾌 · 불쾌감을 일으키는 차이와 정도에 따라 한 징후의 해석이 좌우되는 것으로 ‘심미감의 반응매듭’이라 부를 수도 있다.
넷째, ‘신비주의적 매듭’으로, 가령 각종 물이(物異) · 물괴(物怪), 말하자면 자연사물에 비정상적인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이 왕조의 운세, 시절의 추이 등과 관련지어진 예언이 떠돌았음을 본다.
참요(讖謠)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이런 경우 그와 같은 예언이 형성된 과정의 사고방식에 초논리적 신비주의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령, 진주의 촉석루 아래의 남강에 자리잡은 유명한 논개바위의 경우, 그것이 물가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짐으로써 민족의 앞날을 예언하였다는 속신은 논리적 설명이나 앞에서 든 세 가지 매듭으로는 그 타당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
현지의 사람들마저 그렇게 전해져 왔으니까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임을 보게 된다. 민간전승이 그 전통적 힘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매듭이기도 하다. 국가의 운세, 시국의 변화 등 역사적인 전환기일수록 이와 같은 신비주의의 색채가 짙은 속신이 있게 된다.
속신은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간 생활 주변의 사물과 사물, 현상과 현상을 연관짓고 질서를 지워주는 구실을 다한다. 속신 없이는 별개의 현상이요 사물일 뿐인 것들이 속신의 매듭 속에서 관계된 존재로 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신은 한 전통사회가 그 전통 속에서 자연과 사회, 사물과 인간을 연관 속에서 관찰하고 인식하고 해석한 결과요 과정으로서 그 기능을 다해 왔고, 오늘날에도 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