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후익 ()

문암문집
문암문집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었으며, 『문암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문암(文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고종 25)
사망 연도
1953년
본관
월성(月城)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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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었으며, 『문암문집』 등을 저술한 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월성(月城). 호는 문암(文巖). 아버지는 손진수(孫晉洙). 생모는 여강이씨(驪江李氏) 이능균(李能勻)의 딸, 계모는 여강이씨(驪江李氏) 이능수(李能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경주 금호리(琴湖里)에서 태어나 5세에 할아버지 손최수(孫最秀)에게 처음으로 수학하였다.

이병호(李炳鎬)에게 『효경(孝經)』을 배웠으며 이만규(李晩煃)에게 『시경』을 배웠다. 1914년에 다시 장석영(張錫英)의 문인이 되어 운도재(雲陶齋)에서 수업하였다. 이 밖에 이중업(李中業)·곽종석(郭鍾錫) 등 우국지사를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1917년 작은 아버지 손진형(孫晉衡)이 독립운동을 한 죄로 체포되어 공주(公州)에 수감되자 그 뒷바라지를 했지만 다시 울릉도로 이송되었다. 1919년 이중업·곽종석·장석영 등이 김창숙(金昌淑)을 유림 대표로 선발해 프랑스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시키는 한편 작은 아버지 손진형을 국민 대표로 선정해 중국 상해로 보냈는데, 이 때 벽진(碧珍)까지 따라가서 전송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실토하지 않았다.

1920년 유교진흥회(儒敎振興會)로부터 모종의 제의를 받자, 일제에 협조하는 단체로 규정하고 즉각 거절했다. 1922년 가을에 김창숙이 상해로부터 국내에 잠입,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을 구할 때 김창숙을 도와 자금을 수집했으며, 1926년엔 아버지 손진수와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본래 문재(文才)가 뛰어날 뿐 아니라 장석영에게는 주로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을, 곽종석에게는 문장 작법의 요령을 배워 문장의 대가가 되었다. 이진상·장지연 등의 문집 간행에 참여했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심(心)이란, 이기(理氣)를 겸하고 성정(性情)을 통칭하는 것[李滉], 성정의 총칭[李震相], 이기를 합한 것[郭鍾錫], 심은 이는 아니지만 그것을 주재하는 것은 이다[張錫英] 등의 주리철학을 심학의 정통으로 수용했다. 『문암문집(文巖文集)』 22권에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문암문집(文巖文集)』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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