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경태(景泰), 호는 소남(蘇南). 충청북도 옥천 출생. 할아버지는 천(薦)으로 경연관(經筵官) 동부승지를 역임한 달수(達洙)이며, 아버지는 청도군수를 지낸 병종(秉琮)이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 와서 서법에 뜻을 두고 한말의 제가(諸家)와 교유하면서 정진하여 예서와 초서에 대성하였다. 젊어서는 경성부청(京城府廳 : 서울시청)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자신의 서예를 자랑한 적이 없었다.
광복 후 국전 서예부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창설회원의 일원으로 동회전(同會展)에 출품하면서 서예동호인과 후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송치헌은 예서(隷書)에는 한예(漢隷)에 치중하였으나 주로 조전비(曹全碑)와 공주비(孔宙碑) 및 봉용산송(封龍山頌) 등 원필예(圓筆隷)에 주력하여 당대의 누구도 추종할 수 없을만한 경지에 이르렀고, 또 초서(草書)로는 특히 중국 당나라 서가(書家)인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를 득력(得力)하여 탈속의 높은 계경(界境)을 개척하였다.
일생 동안 서법에 정진하면서 자신의 경지를 과시하거나 또는 속된 부류들과 상종함이 없이 빈한한 생애를 끌어나가면서도 모든 것에 초탈한 은자(隱者)로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