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남정광산(楠亭鑛山)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채굴되었으나 후기에 일시 휴광하였다가 1893년(고종 30) 다시 개광하여 궁내부(宮內府)가 관할하여 금광위원이 상주하면서 덕대식(德大式)으로 채굴하였다.
1905년 국내의 재정 궁핍 등으로 영국인 피어스에게 채광권을 양보하였으며, 1908년 미국인 콜브란과 합작하여 한성광업회사(漢城鑛業會社)를 설립, 경영하였는데 이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916년 광산액이 격증하여 370만 원으로 세계적인 금광산이 되었고, 1932년에는 연간 13만 4,951㎏의 금을 생산하였다.
1937년 중국사변(中國事變)이 일어나 일본의 지하자원 개발이 긴급해지자 그 해 9월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이 내려짐에 따라,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일본광업회사(日本鑛業會社)가 8·15광복 때까지 경영하였다. 현재 북한은 경제적 압박으로 금 산출에 주력하여 금수출로 경제적 적자를 보완하고자 하여 수안광산도 활발히 개발하고 있다.
광상은 화강암과 상원계(祥原系) 석회암 또는 고생대 조선계(朝鮮系) 석회암과 화강암면에 불규칙하게 형성된 접촉광상(接觸鑛床)이다. 금 외에 몰리브덴·창연(蒼鉛)·마그네사이트 등도 함께 생산된다. 취락은 대동강 지류인 율리천(栗里川) 동쪽에 있는 남정리에 광산취락이 발달하였다.
가촌(街村) 형태의 취락으로 시내에는 금광제련소·발전소·광업사무소 등 광산에 관계되는 기관이 모여 있으며, 취락의 대부분은 광산 종업원들의 사택이다. 반대편 언진산 북쪽 사면에 금광인 홀동광산(笏洞鑛山)이 있으나, 수안광산의 생산량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