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는 ‘선[洗]’이라고 표기하였는데 ‘洗’은 원음소전절(原音蘇典切) ‘siən’과 비슷한 음을 가졌던 것 같다. 따라서, 신은 다른 의복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의 필요에 따라서 생긴 자연발생적인 산물이다. 원시시대의 신은 뚜렷한 어떤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고, 짐승의 가죽이나 초목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발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활문화가 발달되면서 의복에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자 신은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의례적 · 장식적 목적으로도 제작되어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신은 그 형태상으로 보아 ‘화(靴)’와 ‘이(履)’로 나눌 수 있다. ‘화’는 화(靴)라고도 쓰며, 북방계통에서 유래된 신으로 ‘이’에 신목[靿]이 붙어 있는 지금의 장화 같은 것으로 긴 신을 말한다. 방한 · 방침에 적당하여 북방족 계통에서 발달하였다.
‘이’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혜(鞋) · 비(扉) · 극(屐) · 구(屨) · 석(舃) · 갹답(蹻踏) 등을 포괄한다. 어떤 독특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는 남방족계통의 신이다. 결국 신도 의생활 측면에서 볼 때는 기본복식과 함께 성장(盛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족의로서 의생활의 독립된 한 분야로서 독특한 발전을 해왔다.
성별 · 신분 · 복식 · 직업 · 재료 · 형태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화’와 ‘혜’를 중심으로 그 재료에 따라 종류를 구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피혁제(皮革製):석 · 흑피화(黑皮靴) · 협금화(俠金靴) · 수화자(水靴子) · 목화(木靴) · 기자화(起子靴) · 사피화(斜皮靴) · 동화(童靴) · 백화(白靴) · 단화(短靴) 등이 ‘화’에 속하고, 흑피혜 · 분투혜(分套鞋) · 투혜(套鞋) · 사피혜 · 피초혜(皮草鞋) · 당혜(唐鞋) · 운혜(雲鞋) · 발막신 · 징신 등이 ‘혜’에 속한다.
② 초마제(草麻製):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으로, 짚신[草履]에는 왕골짚신 · 부들짚신 · 고은짚신 · 엄짚신 등이 있었고, 미투리[麻履]에는 삼신 · 절치 · 탑골치 · 무리바닥 · 지총미투리 등이 있었다.
③ 포백제(布帛製):사(紗) · 나(羅) · 능(綾) · 단(緞)을 재료로 하여 만든 당혜 · 운혜 · 태사혜 등이 있었다(이것의 원바탕은 가죽인데 겉을 포백으로 대었기 때문에 포백제로 취급한다).
④ 유제(鍮製):놋쇠로 만든 신으로 ‘유혜’ 또는 ‘놋신’이라고 하며, 특수층에서 비올 때 신었다.
⑤ 지제(紙製):종이로 만든 신이다. 지혜(紙鞋)는 일반적으로 천한 사람들이 신었다. 지총미투리는 이 중 고급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지혜를 신는 것을 법으로 금하여 점차 소멸되어 갔으나, 순조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⑥ 목제(木製):목극(木屐))이라고 하며 ‘격지’ 또는 ‘나막신’이라고도 불린다.
(1) 전통시대의 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기원은 조선 정조 때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중의 <의복재봉변증설 衣服裁縫辨證說>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중국 황제(黃帝) 때 어측(於則)이 처음으로 ‘비’ · ‘이’를 만들었는데, 풀로 만든 것은 ‘비’, 마(麻)로 만든 것은 ‘구’, 가죽으로 만든 것은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신으로는 부여의 혁탑(革鞜), 마한의 짚신 · 초교(草蹻) · 초교답(草蹻蹋) 등을 들 수 있는데, 가죽이나 풀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이들은 이미 완전한 형태로 한층 진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에 있어서의 신은 그 형태상으로 보아 대체로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화’와 ‘이’로서 이 중에 어떤 것이 먼저 나타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화’와 ‘이’를 구별하여 문헌에 나타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고찰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화:후당(後唐) 마고(馬稿)의 ≪중화고금주 中華古今注≫에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신목이 붙은 화를 처음으로 착용하였는데, 말탈 때 편리한 서호(西胡)의 것이라 하고 있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 夢溪筆談≫ 권1에도 활동에 편한 호복(胡服)이 북조(北朝) 이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착용된 것으로 되어 있어, 화는 중국의 것이 아니고 호풍(胡風)을 수입, 모방해서 착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상대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쌍영총(雙楹塚) 후실(後室) 북벽과 동벽 벽화의 구인행렬도(九人行列圖) 가운데 3인이 화를 착용하고 있으며, 무용총(舞踊塚)의 벽화 무용도(舞踊圖)에는 백화를 신은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미 당시에 화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는 수렵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천인계급에서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의 화는 삼국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대(靴帶)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 권33 복색조(服色條)에는 화대의 재료로 은문백옥(隱文白玉) · 무노뿔 · 상아 · 놋쇠 · 철 · 구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화대의 귀금속장식이 유행하였음을 알려준다. 통일신라시대의 화는 귀족 · 평민을 가리지 않고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화를 보내온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1품에서 9품까지 공복(公服)에 흑피화를, 당상관은 평상복에 협금화를 신는다는 기록이 ≪경국대전≫ 의장조(儀章條)에 있다. 조선 말기에는 흑피화 대신 목화가 많이 착용되었다.
② 이:≪통전 通典≫ 동이조(東夷條)에 삼국 이전 부여 · 마한에서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상류계급에서 황혁리(黃革履)를 신었다. 고구려 무용총 오벽(奧壁) 벽화에는 주인이 황혁리를 신고 있으며 대접을 받는 승려인 듯한 사람은 흑색리를 신고 있다. 백제에서는 왕복에 오혁리(烏革履)를 신었다. 신라시대에는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포백(布帛) · 사제(絲製)의 신들이 발견된다.
이의 유물로는 나주 반남면 옹관묘 출토의 금동리(金銅履), 금관총 출토 금동식리(金銅飾履), 경주 식리총 출토의 금동리, 공주 무녕왕릉 출토의 금동식리 등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에 보면 진골에서 4두품까지 사(絲) · 마(麻) · 나(羅) · 피제(皮製)의 신을 신었고, 평민은 나를 금하고 피마제만 사용하였다.
≪고려사≫와 ≪고려도경 高麗圖經≫을 참고하여 보면 고려시대에는 의종 때 명나라 태조가 보낸 제관복(祭冠服) 가운데 흑리가 있고, 국사(國師)는 오혁구리(烏革句履)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백관조복에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를 신었다.
이상에서 ‘화’와 ‘이’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하면, 삼국시대에는 이를 귀족계급에서 주로 신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화와 이가 병용되었다. 고려 초에는 이를 주로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 화를 많이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혜를 대표적인 신으로 사용하고 화는 상류계급에게만 허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와 화의 이중제도(二重制度)는 조선 말까지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 개화기 이후 서양의 구두 등 새로운 신발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 나라 신의 기본구조를 이루면서 발전하여 왔다.
(2) 근대 이후의 신 1880년(고종 17) 개화파 정객들과 일본 · 미국 등지로 나갔던 외교관들이 구두를 사 신고 돌아오고, 뒤이어 갑오경장이 단행되고 양복이 공인되면서 고종과 엄비(嚴妃)가 구두를 신게 되자, 1895년경부터 상류귀족사회에서 구두를 신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등장한 남성들의 구두는 예복과 함께 신었던 이른바 버튼부츠(button boots)였다. 이것은 신발목이 발 위까지 오고 발등 부분부터 버튼이 달려 잠그게 된 장화형의 신발이다. 여성의 구두로는 굽이 낮은 이브닝 슈즈(evening shoes) · 오페라 펌프스(opera pumps) · 후디드 힐(hooded heel) · 스태크 힐(stack heel) 등이 전파되었다.
1898년 우리 나라 최초의 양화점을 이규익(李圭益)이 개점하였으나, 일년에 고객이 4∼5명에 불과하여 3∼4년 후에 폐점하였다. 그 후 이를 박덕유(朴德裕)가 인수하여 40년간 경영하였다.
또 1908년부터 일본에서 고무신이 수입되었다. 1910년에는 검정 에나멜구두가 등장하였고, 1912년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혁신화(革新靴 : 新式靴 · 改良新靴 · 便利靴 · 輕便靴 · 經濟靴)가 만들어졌다.
1919년에 평양에 고무신 공장이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이병두(李丙斗) · 최규봉(崔奎鳳)에 의해 외코신의 고무신으로 개량되었다. 또 같은해에 ‘대륙고무공업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고무가 군수품으로 조달되면서 고무신 공장이 폐업되어 고무신이 매우 귀해졌다. 이 때에 왕골구두가 만들어졌다. 전라북도의 ‘고려슬리퍼조합’의 여성 고려화(高麗靴)는 왕골로 만든 굽이 있는 신발로 미국 · 오스트리아 · 프랑스 등으로 수출까지 되었다.
1950년 전쟁으로 고무신제조는 다시 침체를 맞이하였고 미국의 구호물품 속의 양화(洋靴) 등으로 구두 · 케미화 · 운동화 등의 착용이 증가하였고, 한복 착용이 줄어들면서 고무신 착용이 점차 줄었다. 5·16이후 신생활복의 권장으로 양장이 일상복이 되면서 다양한 구두의 착용이 더욱 증가되었다.
1960년에는 힐이 달린 고무신이 등장하여 한복에 구두를 신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의 향상 및 86서울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레져 붐이 확산되고 스포츠에 관심이 증대되면서 스포티한 복장에 맞는 운동용 구두 및 운동화 착용이 증가되었다.
또 1996년 한복입기운동이 확산되면서 생활한복에 어울리는 전통양식의 고무신 구두가 보급되고 있다. 신발은 더 이상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개념으로서의 도구가 아닌 의복과 함께 패션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고 실용과 멋을 강조할 수 있는 의복의 일부로 간주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신과 관련된 민속이 많이 전래되고 있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는 관행 등이 있었으며, 짚신장가보내는 풍속이 있는데, 처녀귀신이 시집 못 간 한(恨) 때문에 이승을 떠돌아 다니며 해를 끼칠까 우려하여 그 처녀가 살았을 때 신던 짚신을 동네총각에게 신어주길 청하면 총각은 그 신을 신어주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이를 ‘짚신장가갔다.’고 하며 이것으로써 처녀귀신의 한이 풀린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짚신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와 관련된 속신이 많이 생겨났다. 앞의 짚신장가보내는 풍속도 이와 어느 정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짚신을 빌려 신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짚신의 별칭을 ‘불차(不借)’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질병과 귀신에도 암수의 구별이 있다고 보았는데, 암병귀[病鬼]에 의한 전염병이 돌면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방아공이나 다듬이 방망이를 엮어 동네 입구나 집앞에 걸어두었고, 수병귀에 의한 전염병이 돌면 짚신을 엮어 문앞에 걸어두었다. 짚신을 삼을 때 짚신총을 내는 것을 보고 부부금실을 점치는 것도 이와 관련된 속신이다.
그리고 설날밤에는 하늘의 야광귀(夜光鬼)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발에 맞는 신이 있으면 신고 가는데, 이때 신을 야광귀한테 잃어버린 사람은 일년 동안 재수없다고 하여 설날밤에 신을 숨겨놓는 풍속이 있었다.
신에 대한 속담으로는 ‘신 벗고 따라가도 못따른다.’, ‘신 신고 발바닥 긁기’, ‘짚신감발에 사립(絲立) 쓰고 간다.’, ‘짚신에 정분(丁粉) 칠하기’, ‘짚신장이 헌신 신는다.’, ‘나막신 신고 대동(大同) 배 쫓아간다.’, ‘짚신에 구슬 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