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율이(栗耳), 호는 독재(獨齋). 신후갑(愼後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자수(愼自修)이고, 아버지는 직장 신극정(愼克正)이며, 어머니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조충손(趙衷孫)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에 생원이 되고, 1525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다. 이어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가 되었다가 도제조 정광필(鄭光弼)의 신임을 받아 직장으로 승직되었고, 그 뒤 호조좌랑이 되어서는 국고의 수지(收支)를 정밀하게 처리하므로 노련한 벼슬아치들도 감히 신거관을 속이지 못하였다.
이 때 호조판서 신공제(申公濟)는 신거관을 가리켜 뒷날 판서가 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1533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1534년에 이조정랑이 된 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전한(典翰)·동부승지·대사간·도승지·한성부좌윤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1546년(명종 1)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관작을 삭탈당하고, 1550년에 평해로 유배되었다. 1551년에는 양주로 이배되었다가 1553년에 석방되어 1555년에 여주목사로 재등용되고,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