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거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호조좌랑,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율이(栗耳)
독재(獨齋)
시호
공간(恭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8년(연산군 4)
사망 연도
1564년(명종 19)
본관
거창(居昌)
주요 관직
호조좌랑|호조판서
관련 사건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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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호조좌랑,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율이(栗耳), 호는 독재(獨齋). 신후갑(愼後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자수(愼自修)이고, 아버지는 직장 신극정(愼克正)이며, 어머니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조충손(趙衷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2년(중종 17)에 생원이 되고, 1525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다. 이어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가 되었다가 도제조 정광필(鄭光弼)의 신임을 받아 직장으로 승직되었고, 그 뒤 호조좌랑이 되어서는 국고의 수지(收支)를 정밀하게 처리하므로 노련한 벼슬아치들도 감히 신거관을 속이지 못하였다.

이 때 호조판서 신공제(申公濟)는 신거관을 가리켜 뒷날 판서가 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1533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1534년에 이조정랑이 된 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전한(典翰)·동부승지·대사간·도승지·한성부좌윤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그 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1546년(명종 1)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관작을 삭탈당하고, 1550년에 평해로 유배되었다. 1551년에는 양주로 이배되었다가 1553년에 석방되어 1555년에 여주목사로 재등용되고,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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