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 · 천사옥대(天賜玉帶) · 황룡사구층탑의 세 가지를 지칭한다. 신라 중고기(中古期)에 성립되었으며, 신라의 정치이념과 국민정신의 통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룡사장륙상은574년(진흥왕 35) 3월에 조성된 높이 1장6척의 석가여래좌상과 두 협시보살입상(脇侍菩薩立像)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불상은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유연국토(有緣國土)에 이르러 장륙의 존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로 만든 것이다. 이 장륙상의 조상연기(造像緣起)를 통하여 진흥왕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정법왕국사상(正法王國思想)을 그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고, 인연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륙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한 아육왕의 염원이 신라 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신라의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 강조되고 있다.
신라 삼보 중 두번째의 것인 천사옥대는 579년(진평왕 1)에 상황(上皇)이 보낸 천사(天使)에게 전해받은 것으로,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길이 10위(圍) 62과(銙)로 된 매우 긴 것이다. 진평왕은 이 옥대를 교묘대사(郊廟大祀) 때 반드시 착용함으로써 왕의 신성성(神聖性)과 권위를 돋보이고자 하였다. 그가 자기 스스로를 천제가 옥대를 내려줄 정도로 신성한 임금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던 이유는, 전왕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여 국인(國人)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고 있다. 진평왕은 재위 초기의 정치적인 개혁의 방편으로 이 옥대를 내세웠고, 왕권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53년이라는 장기간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황룡사구층탑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공사를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된 신라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구층탑이 세워지기 직전의 신라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대야성(大耶城)을 비롯한 서쪽의 40여 성이 함락되었고, 이 위기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군사 · 외교 등에 노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의 권유로 탑을 세우게 되었다.
자장은 이 탑을 건립하라는 권유를 중국에서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고,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호법룡(護法龍)이 지켜주고 있는 황룡사에 세움으로써 모든 국민들의 귀의를 유도하고, 불교신앙으로 국민 정신을 통합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높이 67.6m의 거대한 탑을 세워 국력과 왕권을 상징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여자이기 때문에 위엄이 없다는 국내외적 여론을 무마하고,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신장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신라 삼보는 신라의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고, 당시의 정치이념에 불교의 정법왕국사상이 표방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신라 불연국토설과 연결된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이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