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383년(우왕 9) 건립. 높이 1.33m.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 즉 대장경을 인출(印出)·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불우조 (驪州牧佛宇條)에 신륵사의 다른 이름은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甓寺)라는 것과 나옹이 일진당(日眞堂)을 세우고 대장각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즉 이색은 선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아버지 이곡(李穀) 및 어머니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고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년(우왕 6) 2월부터 만들게 하였다.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權鑄)가 정간선을 긋고 자경 2㎝의 해서로 썼다. 권주의 글씨에 대하여 『서청(書鯖)』에는 ‘太古庵碑字 類虞永興(태고암비자 유우영흥)’이라 하였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간단하게 변화되었고, 비신(碑身)의 보전을 위하여 몸체 양쪽을 돌기둥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이것은 이 곳에 앞서 세워진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1379)와 같은 형식이다.
현재 몸체의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나, 비음(碑陰: 비의 뒷면)에는 대장단월(大藏檀越) 사부중(四部衆)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구분하여 그 성명이 열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