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는 반정 때 역신으로 죽은 수근(守勤)의 딸이다. 이에 반정공신 영의정 유순(柳洵)과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이 유자광(柳子光)·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 공신과 육조참판 이상의 관료들을 거느리고 신씨가 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결국 신씨는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 사저로 쫓겨났다가 다시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가 원자(元子 : 후의 인종)를 낳고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이 상의해 신씨폐위의 신원(伸寃)과 왕비로 복위할 것을 상소하는 한편, 폐위를 주장한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의 삭탈관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사간 이행(李荇)은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왕자가 탄생하게 되면 원자의 처지가 난처해진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를 주창하였다. 대사헌 권민수(權敏手), 집의 허지(許遲), 사간 김내문(金乃文) 등이 그에 찬동하여 박상·김정의 상소를 사론(邪論)으로 지목하여 합계(合啓)를 올림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영중추(領中樞) 정광필(鄭光弼), 지중추(知中樞) 신용개(申用漑), 부제학 노근사(盧謹思)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상은 남원현으로, 김정은 보은현으로 귀양갔다. 그 뒤 1672년(현종 13) 이조참의 이단하(李端夏)의 상소로 인해 신씨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게 하고 제수를 내려주었으며, 묘지기 7호(戶)를 두게 하였다.
1739년(영조 15) 왕이 신씨복위에 관한 일을 대신에게 물은 지 며칠 뒤, 유생 김태남(金台南)의 찬성 상소가 있자 비로소 신씨의 복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묘호를 능으로 봉하고 중종사당에 부제(祔祭 : 일정한 喪기한을 지나 신주를 할아버지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