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봉상시판관, 의주도병마사, 좌군도총제 등을 역임한 무신 · 공신.
이칭
시호
무절(武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53년(공민왕 2)
사망 연도
1426년(세종 8)
본관
영산(靈山,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영월(寧越)
주요 관직
의주도병마사|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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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봉상시판관, 의주도병마사, 좌군도총제 등을 역임한 무신 · 공신.
개설

본관은 영산(靈山)인데 영월(寧越)로도 쓴다. 아버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으며 용맹이 뛰어났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의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태조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제가 된 이방원(李芳遠: 후의 태종)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趙涓)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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