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 · 구암(苟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신상현(申常顯)의 아들이다. 대유학자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52년(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 이조정랑 ·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66년에 이조참판 · 대사헌, 1871년에 강원도관찰사, 1873년 형조판서 · 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2년 7월 판부사(判府事)로 있으면서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는데, 특히 인천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 · 지리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최대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에 의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연로하여 퇴임한 뒤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