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16일 평안북도 용암포(龍巖浦)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당 지방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는 기념사를 통해 폐교조치된 수산기술학교 복구를 촉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대장 이종흡(李宗洽)의 만행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하고 나선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이에 소련군과 공산당측은 이들을 공격하였고, 평안교회의 장로를 현장에서 사살하고, 12명의 학생 및 시민 또한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신의주시 평안북도 학생자치대 본부에 전해졌고, 격분한 신의주시의 6개 남녀중학생들은 11월 23일 상오 9시 학교 강당에 집합하여 ‘공산당타도’를 결의한 뒤, 3개 조로 나뉘어, 제1조인 신의주동중학교와 제일공립공업학교 학생들은 평안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제2조인 사범학교와 제2공립공업학교 학생들은 평안북도공산당 본부를, 제3조인 평안중학교와 신의주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신의주보안서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하오 2시 정각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조가 평안북도인민위원회에 도달하자 보안부에서는 기관총을 난사, 치열한 공방전 끝에 1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2조는 평안북도공산당 본부의 앞뒷문을 부수고 진입, 공산당의 무차별사격을 받으면서 당사 점령에 성공하였으나, 10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제3조는 목표 지점으로 시위행진을 하던 중, 미리 대기하고 있던 소련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물러났으나 뒤늦게 신의주 학생들의 봉기소식을 들은 사범학교의 부속 강습생들과 신의주남공립여자중학교 학생들이 시인민위원회를 습격, 기밀문서 등을 빼앗고 공산당원들로부터 그들의 과오에 대한 사죄를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피살된 학생은 23명, 중경상자 700여 명이었고, 사건 이후 검거·투옥된 학생과 시민은 무려 2,000여 명에 달하였다.
신의주는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공산당들의 세가 가장 심하였고, 이 사건은 그들의 조직적 탄압이 학원에까지 침투하자, 학생들이 학원의 신성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