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치개혁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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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창당된 박찬종(朴燦鍾) 1인중심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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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92년 2월 창당된 박찬종(朴燦鍾) 1인중심 정당.
내용

박찬종은 1990년 1월의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의 3당합당 때, 통일민주당 소속이었으면서도 그 당 총재인 김영삼(金泳三)의 합당로선에 반발하여 민주당에 잔류하였다.

박찬종은 뒤 이어 민주당이 이기택(李基澤)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 반발하여 민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박찬종은 1992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1992년 2월 기성정치권과 관계가 없는 정치지망생들을 끌어 모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였다. 박찬종은 신정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3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신정당은 총 11명의 지역구 후보자를 입후보시켰으나 박찬종 1인만 당선되었다. 박찬종은 1992년 5월부터 신정당의 대통령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노상토론회와 거리유세 등을 실시하며 20∼30대의 젊은 유권자들을 파고들었다.

1992년 12월의 대선에서 박찬종은 3김으로 불리우는 김영삼·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 등의 노인정치인들에 혐오감을 가진 젊은 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1백50만 표를 획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박찬종은 3김시대가 끝나고 나면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될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근거로 박찬종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정당은 박찬종 1인에 의존하는 정당이어서 정당으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단지 명맥만 유지하였다. 박찬종은 통일국민당 대표 김동길(金東吉)과 합당교섭을 전개하여 1994년 5월 두 당을 합당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한 합의에 따라 1994년 7월 신정당과 국민당은 통합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신정당은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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