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국민회는 하와이의 교포단체인 한민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발족하였다. 1910년 2월 국민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되며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였다. 그에 따라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와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제118호까지 발행)가 통합되어 『신한민보』(제119호)로 발간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면서 대동보국회 기관지 『대동공보』 역시 『신한민보』로 통합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최정익(崔正益)이었다. 제1호 사설에서 과거의 『공립신보』가 일개 단체의 대변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새롭게 출발하는 이 신문은 민족 전체의 대변기관으로 자처하였다.
국문으로 매주 수요일에 발간되어 국권회복운동에 관련된 논설과 기사를 싣고 국내 소식과 재외동포에 대한 소식도 광범위하게 실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행하였다.
국내에도 일부 유입되어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압수되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1910년 이후에는 국내 독자에게는 거의 배포되지 못하였다.
이 신문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재미동포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여 창간 초기부터 서적광고를 빈번히 게재하고 일반 신문 구독자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신문의 광고로는 『청구신보』·『학생영문보』·『한인신문』 등의 판매대리 광고를 게재하였고, 일반 도서광고로는 국사·기독교서적·일반 교양도서 등이 눈에 띄었다.
1910년 5월 14일 이항우(李恒愚)가 편집인이 되어 영문난(英文欄)을 신설하였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지하고 최정익이 다시 편집을 맡았으며, 그 뒤 박용만(朴容萬)·홍종표(洪宗杓) 등이 맡았으나 경영난으로 휴간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1915년 3월 11일부터는 이대위(李大爲)가 고안한 인터타입의 식자기로 최초의 신식 국문활자를 사용하여 신문을 제작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20일부터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궁금한 국내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주간으로 발행하던 것을 격일간으로 변경해서 발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국민회는 1922년 하와이 지방총회가 분리, 독립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신한민보』도 4월 10일부터 8월 10일까지 휴간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 다시 속간되어 꾸준히 발행되어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했으며, 1937년 3월 4일자부터는 4면에 영문기사를 게재하여 미국에서 자라난 자녀들의 구독 편의를 제공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발행되어 오다가 1974년 9월 김운하가 인수하여 월간으로 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