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분권 1책. 필사본. 저자의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순조 연간, 저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편집, 필사된 고본으로 추정된다. 서문과 발문이 모두 없다.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유일본으로 있다.
서(書) 12편, 잡저 5편, 제문 3편, 서(序) 1편, 기(記) 3편, 장(狀) 2편, 설(說) 1편, 가장(家狀)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최수(崔琇)에게 보낸 4편을 비롯해 친지들과 안부를 교환한 내용이다.
잡저에는 「의세속혼취론(議世俗婚娶論)」·「설과거(說科擧)」·「의세속천양설(議世俗闡揚說)」·「의세속기우풍신설(議世俗祈佑風神說)」 등 당시의 풍속과 제도에 관해 논설, 비판한 글이 대부분이다.
특히, 「의세속혼취론」은 재산이나 이익을 중시하는 당시의 혼인 풍속을 비판하는 한편, 의리와 염치를 강조해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강하게 드러낸 글이다. 「의세속기우풍신설」에서는 귀신에게 기도하여 복을 바라는 풍속이 만연되어 있음을 개탄하며, 치교(治敎)를 바로 세워 이런 폐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에는 자신의 호에 대한 설명인 「심와기(深窩記)」 외에 1792년(정조 16) 3월 이황(李滉)의 제사를 위해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가는 길에 내연산(內延山)을 탐방한 기행문인 「유내연산기(遊內延山記)」가 있다.
장의 「청설오리사창장(請設五里社倉狀)」은 자기 고장에 사창을 세워 줄 것을 영문(營門)에 청원한 글이다. 당시 민생의 어려운 실상과 사창의 필요성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순조 때 김희순(金羲淳)·이상황(李相璜) 등에 의해 사창의 문란과 폐단으로 인한 사창의 존폐 여부가 크게 논란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참고 자료가 된다.
설의 「백련정산수설(白蓮亭山水說)」은 자기가 살던 고장의 산수를 예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