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서 동으로 16㎞ 거리에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고개를 가리킨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남한산성이 포위, 고립되자 제도(諸道)의 감사나 병사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이 때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栐)도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쌍령에서 청군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허완은 미처 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일군이 패하여 전사하였으며, 민영은 휘하의 군사를 독전하여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일군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용인 험천(險川)에서 패한 싸움과 함께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예전 쌍령 전장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 등의 제언으로 전사자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하여 위령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734년(영조 10) 왕명으로 이 곳 쌍령전망처(雙嶺戰亡處)에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