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신. 기독교신자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후 고향에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1개월간 구류를 살았다.
그 해 11월 감리교 여성신자로서 중진이던 오신도(吳信道)·안정석(安貞錫) 등과 같이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고 평양본부의 교통부원 겸 강서지회 재무를 담당하였다.
많은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0년 초 동지 106명이 일본경찰에 잡히자, 김행일(金行一)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8월의 미국의원단 일행의 내한을 이용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하자, 제2대에 참가하여 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5월에 도보로 상해를 출발하여 8월 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평양시내를 진동시켰고, 평양시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투탄하였으나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되었다.
그 뒤 피신하여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에 숨었으나 이듬해 3월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공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