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생(安魯生)은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춘곡(春谷), 호는 죽계(竹溪)이며, 이재(伊齋) 혹은 이재(頤齋)라고 자호했다. 그의 조부는 중대광(重大匡) 안원형(安元衡)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안면(安勉)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 민년(閔年)의 딸이다. 그의 부인은 인천이씨(仁川李氏) 전의감(典醫監) 이자충(李資忠)의 딸이다.
안노생은 1376년(우왕 2) 6월, 지공거(知貢擧) 홍중선(洪仲宣)과 동지공거(同知貢擧) 한수(韓脩)가 주관한 과거 시험에서 정총(鄭摠) · 양수생(楊首生) · 성석용(成石瑢) · 류백순(柳佰淳) · 강회백(姜淮伯) · 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4월에 안노생은 군자소윤(軍資少尹)으로 서북면찰방별감(西北面察訪別監)이 되어 국경에서 원나라와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하던 것을 철저히 단속하여 법을 위반하는 자가 없도록 하였다. 6월에 그는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었으며 강직하고 결백한 성품을 왕에게 인정 받아, 이해 9월에 세자가 명나라에 갈 때 수행원을 검찰(檢察)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행원들은 수행을 기회로 삼아 밀무역을 하며 사욕을 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4월에 그가 병조총랑(兵曹摠郞)의 지위에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는데 안노생도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된 후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안노생은 1399년(정종 1)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1400년(정종 2)에는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겸 지제교(知製敎)로 중용되었다. 1401년(태종 1) 1월에 그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을 때 중국의 균름(囷廩) 제도를 모방하여 경상도의 주 · 부 · 군 · 현에 곡식 저장 창고를 지었다. 경상도안렴사 재임 시 그는 울산의 대화루(大和樓). 곧 지금의 태화루를 중건하였다. 1403년(태종 3) 7월에 안노생은 좌사간(左司諫)이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지방 행정 조직 개편에 대해 건의한 것을 두고 사헌부와 갈등이 재현되어 탄핵을 받아 1404년 1월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7월에 그는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복귀하였으며, 1406년(태종 6) 10월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신정을 하례하기 위한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안노생은 1407년(태종 7) 5월에는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가 되어 당시 분쟁이 많았던 노비 재산상속에 관한 의견을 상소하였다.
같은 해 6월에 그는 이조참의(吏曹參議), 8월에는 개성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 겸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9년(태종 9) 4월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이후 1411년(태종 11) 2월에 안노생은 판광주부사(判廣州府事), 1413년(태종 13) 3월 인녕부윤(人寧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안노생은 『이재집(伊齋集)』(혹은 『이재집(頤齋集)』)이라는 문집을 저술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지은 「석탄정기(石灘亭記)」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한다.
안노생의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 신당산에 있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9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