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중가구동 고분 ( )

선사문화
유적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있는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진 6세기 초반의 신라고분.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군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높이
서북 기준 1.2m|동남 기준 2.8m
지름
20m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내용 요약

안동중가구동고분(安東中佳邱洞古墳)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있는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진 6세기 초반의 신라고분이다. 이곳에서 확인되는 다수의 구덩식돌덧널과 앞트기식돌방은 안동 지역에서 확인되는 대형 고분군이지만, 안동 재지 세력 중 중간 정도 세력의 고분으로 보인다. 껴묻거리 중 토기류는 신라양식 토기에 속한다. 이 고분은 안동 부근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과 구조나 껴묻거리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신라고분 문화의 특색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있는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진 6세기 초반의 신라고분.
발굴경위 및 결과

안동중가구동고분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의 미두골 마을 남쪽 구릉에 자리한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곳은 북쪽의 해발 460m인 와룡산에서 남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로 주위에는 고려장등(高麗葬嶝)이라고 불리고 있어 많은 고분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대형 또는 중소형 크기의 고분이 수백 기를 헤아리고 있지만, 일찍부터 도굴되거나 자연적 유실로 인하여 매장 주체부가 노출되고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고분은 대부분 소형분이지만 특정 지점마다 대형분이 조영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 대형에 속하는 1기의 봉토분이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형태와 특징

발굴된 고분은 직경 20m로 서북에서 동남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고분의 형태는 묘곽(墓槨)의 주축 방향에 따라 축조되었다. 봉분의 높이는 봉분이 위치한 능선의 경사로 인하여 서북에서 1.2m, 동남에서 2.8m 정도로 약간 높다.

봉토의 밑지름은 긴 축이 20m, 짧은 축이 15m 정도이고, 쌓여진 봉토는 황갈색의 부드러운 사질토로 축조하였고, 주1 위에는 의도적으로 정선되고 찰진 황갈색 사질토를 40㎝ 가량 덮었는데, 이는 빗물이나 동식물의 침투를 방지하려고 한 방식이었다.

매장 주체부는 이중곽 형태로 주곽과 부곽이 약 2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봉분은 이 두 개 곽을 하나로 덮었다. 묘곽의 긴 축 방향은 동남에서 서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길이 5m, 너비 2m 정도이며 개석을 다섯 개로 덮었고, 개석 사이에는 작은 돌로 막고 전체를 점토로 덮어 씌웠다. 석곽의 네 벽은 깬돌로 쌓았는데 틈 사이에 점토를 발랐다.

평면 형태는 서북 짧은 벽이 넓고 동남 짧은 벽이 좁은 사다리꼴이나 좁은 쪽 짧은 벽을 둥글게 처리한 특징이 있다. 네 벽은 긴 벽을 위로 올라가며 안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동남 짧은 벽은 수직으로 쌓아 올렸지만, 서북 짧은 벽은 외부에서 돌을 끼운 듯한 축조 기법으로 보아 이곳이 출입 시설인 입구로

주검받침주2은 서북 짧은 벽에서 3㎝ 정도의 간격을 두고 긴 벽을 따라 놓여진 돌로 열을 지어 만든 석렬(石列)로 길이는 북 1.5m, 서남 1.3m이다. 그 위에 머리뼈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시신을 안치한 시설로 판단된다.

주검받침 주위에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돌들은 추가장(追加葬)의 흔적으로 보인다. 매장 인원은 모두 5인 전후의 사함의 뼈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추가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돌방의 서북 짧은 벽에서 100㎝ 정도의 사이를 두고 발견된 소형 돌덧널은 원형이 훼손된 상태였다. 크기는 길이 80㎝, 너비 30㎝, 잔존 높이 15㎝이며, 동남 긴 벽은 큰 깬돌을 사용하고 나머지 세 벽은 작은 깬돌을 놓아 장방형으로

껴묻거리주3는 돌방에서 동지금장제 작은고리귀걸이 6점, 쇠도끼, 쇠손칼, 덩이쇠 등의 철기류와 이단투창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굽달린긴목항아리, 짧은목항아리, 손잡이달린굽달린사발, 두귀달린사발, 굽달린사발, 손잡이달린잔 등 토기류가 출토되었고, 소형 돌덧널에서는 적갈색사발 1점과 짧은목항아리 1점 등 토기 2점만 출토되었다. 출토된 껴묻거리 중 토기로 볼 때, 고분이 최초로 축조된 시기는 대체로 5세기 후반이고, 마지막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진 때는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토기의 형식은 이른 것이 경주 황남동 109호 1 · 2곽, 늦은 것은 황남리 82호 서곽 정도로 신라양식 토기이다. 금공품 중 작은고리귀걸이 6점은 주로 머리뼈 주위에서 수습된 점으로 보아 귀걸이로 착용하였으며, 형식적으로 네 종류가 확인되므로 적어도 피장자는 4인 이상으로 추정된다.

의의 및 평가

안동중가구동고분에서 확인되는 다수의 구덩식돌덧널과 앞트기식돌방은 안동 지역에서 확인되는 대형 고분군이다. 그러나 출토된 도질토기(陶質土器)나 금공품 등으로 판단할 때 일직면의 안동조탑동고분군이나 태화동 · 옥동고분군 등과 비교하면 위계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안동 재지 세력 중에서도 중간 정도에 위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질토기류는 신라양식 토기의 범주에 속하지만, 경주 중심지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비하여 질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것은 재지의 토기 제작 장인이 2차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아 제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일부 토기에서 의성양식 토기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분은 태화동 · 옥동 · 조탑동 · 마동고분군 등 안동 지방의 부근 고분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고분들과 함께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신라고분 문화의 특색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논문

박광열, 「신라토기」(『영남의 고고학』, 영남고고학회, 2015)
박천수, 「중가구리 고분군」(『한국고고학 전문사전』, 2014)

기타 자료

「안동 중가구동고분군 발굴조사보고」(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77)
주석
주1

무덤 구덩이를 덮는, 판으로 된 돌.    우리말샘

주2

주검을 널에 넣지 아니하고 직접 안치하여 두던 밑받침. 몸 전체를 받칠 수 있도록 만든 것과, 머리와 발만을 받치도록 머리고임과 발받침만을 만든 것이 있다.    우리말샘

주3

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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