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옥성리 산12-3 일대에 있는 원삼국시대 혹은 삼한시대에 조성된 무덤군으로,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유구가 약 600여 기, 유물은 3,500여 점에 달한다. 흥해 지역은 진한 12국 중에서 근기국(勤耆國)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비정되며, 『 삼국사기』에 사로국(斯盧國)이 초기에 동해안으로 영역을 넓힐 때 복속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국보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덤군은 흥해읍의 서쪽에 있는 해발 50m의 봉안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 중 신당과 갱실골 사이에 동서로 이어지는 구릉의 정상부와 동편 능선상에 자리한다. 현재까지 1998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을 시작으로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2003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2년 성림문화재연구원, 2015년 성림문화재연구원과 한국문화재재단(현, 국가유산진흥원), 2021년 한성문화재연구원과 금오문화재연구원 등 총 7개의 기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이 학술 조사 보고서에 수록되었다.
포항옥성리고분군에서 확인된 유구는 나무널무덤,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돌돌림덧널무덤, 독무덤, 돌덧널무덤, 토광묘(土壙墓) 등 총 600여 기 이상이다. 이중에 나무널무덤은 20여 기가 확인되었으며, 조영된 시기는 서기전 2세기 후반에서 서기 3세기 전반이다. 덧널무덤은 450기에 달하며, 조영된 시기는 서기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조사된 유구의 수량으로 볼 때 이 시기가 최고 전성기로 추정된다.
나무널무덤 단계의 무덤은 ‘가’ 지구 67호, ‘나’ 지구 1 · 8 · 72 · 115호, 한국문화재재단 1 · 3 · 4 · 5 · 7 · 8 · 11호, 성림문화재연구원 1 · 2호 등이 있다. 나무널무덤의 장단축비가 1.5 : 1 정도이고 남아 있는 깊이가 70㎝ 이상의 규모로 모두 등고선과 직교한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가’ 지구 67호의 예로 보아 비교적 무덤구덩이를 깊게 파고 내부에 나무널을 설치한 후 나무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에 구덩이를 팔 때 나온 암반 부스러기와 흙을 섞어 채워 넣었다. 유물은 주로 충전토(充塡土) 위에 부장하였으며, 쇠뿔모양손잡이항아리와 주머니항아리 등의 토기류와 쇠낫 · 쇠도끼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나무널무덤을 분석한 결과, Ⅰ기는 처음으로 나무널무덤을 조성하는 단계로 부장품은 원형이나 삼각형 아가리의 덧띠토기와 구리칼, 철체 농기구들이 출토된다. 이 시기는 영남 지역의 다른 유적과 비교해 볼 때 위계의 차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Ⅱ기는 포항옥성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곡리, 성곡리, 남성리 무덤군으로 확장된다. 출토된 유물은 전기 와질토기(瓦質土器) · 청동제 무기류 · 청동 무기의 부속구류 · 철제 무기와 농공구류 등이다. 이 단계는 출토된 유물로 보았을 때, 이전 시기에 비하여 좀 더 유력자 간에 위계화가 일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Ⅲ기는 지속적으로 나무널무덤의 축조가 이루어지고, 부장품은 후기 와질토기 · 재가공된 구리칼 · 칼자루끝장식 · 의식에 쓰이는 청동제 의기류(儀器類) · 장신구 · 칼부속구 · 칠기류 등이다. 이 시기까지는 포항옥성리고분군이 조영된 사회는 점진적으로 무덤의 수가 증가하면서 규모도 커지고 중상위 위계의 계층 무덤이 늘어나 어느 정도 집단 내 사회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성된 나무널무덤의 분포가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유력자 간의 위계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없다. 나무널무덤 조영 단계의 포항옥성리고분군은 주변에 자리한 성곡리 나무널무덤 집단과 비교하여 위계가 낮다고 볼 수 있지만, 이때까지는 유력한 집단이 등장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흥해 지역에서 덧널무덤 단계는 무덤 수와 부장품의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주변의 마산리, 남성리, 성곡리, 학천리 유적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영남 지역 내에서 가장 우월하고 많은 수량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덧널무덤은 무덤 몇 기가 인접하거나 열을 지어 동일한 묘역에 축조되는 여러덧널식 형태의 배치 양상이 확인되고 그러한 군이 몇 개가 모여서 하나의 집단 묘역을 형성하기도 한다. 덧널무덤 집단 묘역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무덤의 피장자들의 친연 관계에 따른 배치이며, 무덤 축조가 몇 개의 소집단에 의해 구역을 나누어 이루어졌거나 혹은 무덤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소집단이 분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덧널무덤의 축조는 이전 시기의 나무널무덤과 달리 무덤구덩이의 깊이가 3040㎝ 내외로 많이 얕아진다. 그리고 장단축비가 1.72 : 1 정도의 장방형 덧널무덤 단계와 장단축비 2.5 : 1 이상의 세장한 평면과 딸린덧널이 출현하는 세장방형 덧널무덤 단계로 나뉘는데, 후자는 소위 경주형 덧널무덤 혹은 신라식 덧널무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장방형 덧널무덤 단계의 유구로는 ‘나’ 지구 60 · 78 · 84호 등이 있는데, 78호가 유명하다. 이 무덤은 대형 덧널무덤으로 구릉의 꼭대기 부분 가까이에 입지한다. 암반을 거의 수직으로 굴착한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길이 572㎝, 너비 330㎝, 깊이 40㎝이며, 덧널의 크기는 길이 380㎝, 너비 150㎝ 정도이다.
목곽은 분포된 목탄과 유물의 배치상으로 볼 때, 2중으로 된 관곽(棺槨)일 가능성이 있으며, 토기류의 배치는 ‘ㄴ’자상으로 놓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철모(鐵鉾)의 부장 양상으로 여러 점을 다발로 묶어 놓았는데 총 104점이나 출토되었으며 피장자의 머리쪽에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
세장방형 덧널무덤은 ‘가’ 지구 16 · 35 · 39 · 133호, ‘나’ 지구 17 · 29호 등이 있다. 나-17호는 무덤구덩이의 길이 737㎝, 너비 171㎝ 정도로 매우 세장한 형태를 취하고 같은 구덩이에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이 설치되어 있는데, 경주형 덧널무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나-29호 역시 같은 구덩이에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길이 643㎝, 너비 220㎝ 정도이다.
이 단계의 유물들은 대체로 후기 와질토기를 포함한 토기류, 대량의 쇠투겁창 · 쇠화살촉 · 쇠칼 · 고리자루큰칼 · 납작쇠도끼 등을 비롯한 철제 이기(利器)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쓰는 여러 가지 도구인 무구(武具) 역시 출토되었다.
덧널무덤 단계의 Ⅰ기는 나무널무덤의 전통이 남아 있는 덧널무덤이다. 전 단계에 비하여 축조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대규모로 군집 현상이 일어나고, 입지는 우월한 능선의 정상부에 대형 덧널무덤이 조성되면서 차별성이 이루어진다. 특히 78호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볼 때 이 시기 흥해 지역은 포항옥성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하였고, 유력한 집단의 등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축조된 개별 덧널무덤의 입지 우월성, 규모의 극대화, 부장품의 차별화로 집단 내에서 유력자의 위계화가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Ⅱ기는 세장방형 덧널무덤이 축조되면서 딸린덧널이 발생하는 시기로, 토기는 후기 와질토기에서 고식(古式) 도질토기(陶質土器)로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묘제와 부장되는 토기의 양상이 바뀌면서 새롭게 전쟁 무기인 철제 갑옷투구가 부장되며, 부장품이 Ⅰ기에 비하여 현격히 감소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이때부터 경주와 관련성이 깊은 도질토기류, 미늘쇠와 고사리무늬쇠투겁창 등 철기류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경주의 사로국 지배 하에 복속되어 신라의 동해안 요충지로 전락한 시기로 보인다.
Ⅲ기는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돌림덧널무덤이 상위 묘제로 채택되었다. ‘가’ 지구의 1 · 2 · 17 · 55 · 75 · 77호 등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구덩식에 위쪽 부분에는 돌무지를 하지 않은 소위 돌돌림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5세기부터 축조되는 돌덧널무덤은 대부분 작은 규모이며, 깬돌과 냇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이후 6세기부터 지속적으로 앞트기식돌방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을 조영해 나갔다.
포항옥성리고분군은 현재까지 조사 성과에 의하면 영남 지역 동 시기의 최대 집단 묘역을 가진 유적이다. 이는 문헌에 나타나는 진한 12국 중 근기국이 포항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자리하였다는 비정을 인정한다면, 포항옥성리고분군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포항옥성리고분군은 서기 전후부터 3세기 후반까지는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면서 강력한 지역 정치체를 성립하였다. 하지만 4세기 초반부터 경주 사로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병합되어 그 영향권에 놓인 이후 신라가 동해안을 진출하는 관문 및 교두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