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경(善卿). 참판 안성(安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종생(安從生)이고, 아버지는 안동판관 안팽로(安彭老)이다. 어머니는 복천군(福川君) 참판 권개(權愷)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식년시에서 생원에 급제하였고,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그 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박사가 되고, 1487년에 종부시주부, 1488년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舍人)·지제교 겸 사관(知製敎兼史官)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相禮)·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을 거쳐 1503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7년(중종 2)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 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한성부윤·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단군과 기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敬祖精神: 선조의 숭배정신)과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21년에 공조판서로 복직하고,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