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진(子珍)이고, 호는 죽창(竹窓)·죽제(竹齊)이다. 안종약(安宗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안구(安玖)이다. 아버지는 부윤 안지귀(安知歸)이며, 어머니는 형조참판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중형 안선(安璿)과 함께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466년 왕이 강원도에 행차해 시행한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사록(司錄)·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당대의 명사로 뽑혀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이조정랑·교리(校理)·응교(應敎)·장령(掌令) 등을 거쳐, 1481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한때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폭로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임사홍이 물러난 뒤에 다시 등용되어 군기시정(軍器寺正)·부제학·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7년 양주목사로 나갔다가 1493년 이조참의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494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이어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한성부우윤·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00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1502년 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506년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14년(중종 9) 특별히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가 바로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다. 영의정 유순(柳洵)·이손(李蓀) 등과 교우가 깊었다. 필적으로는 광주의 「밀성군침비(密城君琛碑)」·「좌찬성한계희비(左贊成韓繼禧碑)」와 시흥의 「월성군이철견비(月城君李鐵堅碑)」가 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