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자하동에 있었던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
내용
그러나 6개월 뒤 진호가 병으로 죽어 고려에서는 시신을 돌려보냈는데, 견훤은 고의로 죽인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인질로 있던 왕신을 죽였다.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대규모 전투 후 태조는 억울하게 죽은 왕신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이 국가적 대찰로 면모를 갖춘 것은 1117년(예종 12)이다. 예종이 편액을 송나라에 청하니 휘종(徽宗)이 듣고 어필(御筆)로 불전의 편액을 ‘능인지전(能仁之殿)’이라 쓰고, 송나라 태사(太師) 채경(蔡京)에게 명하여 문의 액자를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라고 써서 법전(法殿)에 쓸 재물, 화상(畵像) 등과 함께 보내주었는데, 예종은 신하에게 명하여 문의 액자를 사문(寺門)에 걸게 하였다.
단청과 구조의 아름다움이 당시 제일이었다고 하며 사문에서 어화원(御花園)까지는 약 6, 7리가 되는데, 붉은 언덕, 푸른 뫼뿌리가 가로 벌리고 옆으로 펼쳤으며, 시내가 있어 돌길을 흐르는데 물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 사면으로는 송백수(松栢樹)가 하늘에 닿았으며, 여름이라도 언제나 가을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의 가람배치는 고려시대 및 우리나라의 사찰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화사문을 들어서면 서편으로 냉천정(冷泉亭)이 있고, 그 북쪽으로 자취문(紫翠門)과 신호문(神護門)이 있었다. 문루의 동쪽으로는 제석상(帝釋像)이, 그 서편으로는 향적당(香積堂)이 있었다.
본전(本殿)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고, 본전의 동서로 양화각(陽和閣)과 중화각(重華閣)이 있었다. 그 뒤로 다시 3문이 있었는데 동문인 신한문(神翰門) 속에 능인전(能仁殿)이, 중문인 선법문(善法門) 속에는 선법당(善法堂)이, 서문인 효은원(孝恩院) 속에는 미륵전(彌勒殿)이 있었다. 이 당전(堂殿) 사이에 관음상(觀音像)과 약사상(藥師像)을 모신 전당이 있고, 동쪽으로는 역대 조사들의 화상을, 서쪽으로는 지장탱화(地藏幀畵)를 모셨다.
그러나 송나라의 휘종이 보내왔다는 16나한은 어디에 봉안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밖에도 승도(僧徒)들의 객실을 비롯하여 왕이 머무는 재궁(齋宮)이 있는데, 재궁은 심방문(尋芳門)을 지나 응상문(凝祥門)과 향복문(嚮福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재운각(齋雲閣)이 있어 항상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그 뒤에 안화천(安和泉)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화초와 대나무숲, 괴석에 둘러싸인 이 절의 외경(外境)은 병풍 속의 사찰 같은 착각을 들게 할 만큼 화려와 조화의 극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절은 예종 이후 많은 왕가 종친들의 귀의를 받았는데, 특히 예종의 비이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진당(眞堂)을 만든 뒤 왕가의 행향(行香)이 더욱 성행하였다고 한다. 예종이 중창했을 때 이곳의 주지는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었으며, 즐겨 행향했던 왕은 예종·인종·의종·명종·고종·충렬왕·공민왕 등이었다.
그러나 절은 고려의 멸망 후 동서 약 100칸, 남북 약 40칸의 초석만을 남긴 채 폐사로 남아 있었다. 1930년 옛터에 승려 김만영(金萬永)이 시주를 얻어 다시 중창한 뒤 31본산(本山) 중 정족산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89년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파한집(破閑集)』
- 『역옹패설(櫟翁稗說)』
-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 『북한의 전통사찰』(양사재 편집부, 양사재, 2010)
- 『북한사찰연구』(사찰문화연구원, 1993)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송도의 고적』(고유섭, 열화당, 197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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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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