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사회를 총괄하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는 1910년에 들어와 국권상실이 점차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일반 동포에게 「근고문(謹告文)」을 돌려 미주와 하와이에 산재한 정치·종교·실업·사교 각계의 대소 단체를 통합하여 미주 본토에는 애국동맹단을, 하와이에는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을 각각 조직하여 합병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에 따라 애국동맹단은 같은 해 7월 3일 최정익(崔正益)을 단장으로 선임하고 외교원에 윤병구(尹炳球), 서기에 이원익, 번역원에 이대위(李大爲), 장재에 허승원, 회계에 주성학 등의 부서와 임원을 선임하였다.
이어 9개조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일본을 적국으로 간주, 적대행동을 취하기로 맹약하였으며, 국권상실 이후에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재미한인의 군인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하와이의 대동공진단과 공동으로 「무예장려문」을 발표, 한인의 무예정신을 고취시키고 『체조요지』를 출판하여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장려하였다. 결국, 이러한 활동은 뒷날 미주 본토 각지 에 한인무관학교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으며, 미주한인사회의 무장항일노선의 주요한 흐름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