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명보(明甫). 좌부장(左副將) 엄용화(嚴用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엄서(嚴曙)이고, 아버지는 직장(直長) 엄인달(嚴仁達)이다.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첨정(僉正) 심진(沈鎭)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으나 붓을 꺾고,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로 등용되고, 1606년(선조 39) 남해현령이 되었다. 이듬해 도총부도사가 되면서 비변사낭관을 겸임하였다. 이어서 안동판관을 거쳐 함안군수 등을 지내면서 청렴한 수령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청량산(淸凉山)을 수축해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있을 때에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엄황의 선정에 감동한 읍민들이 조정에 올라가 유임을 청원해 마침내 누명을 벗고, 그 곳 군수로 다시 부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경상좌수사가 되면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624년(인조 2) 경상우수사로 재직하던 중 관의 곡식을 빼돌렸다 하여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북쪽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이듬해 평산부사를 거쳐 의주부윤이 되어 변경의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으로서 병사들을 정비해 끝까지 국경을 사수했으며,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올랐다. 1631년에 훈련원도정이 되었다가 파주목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이어 수안·영암·평해의 군수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48년(인조 26) 내직인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1652년(효종 3)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춘천지(春川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