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침입하자 원호는 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해에 다다랐으나, 적병이 이미 조령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여주에서 향병을 모집한 뒤, 1592년(선조 25) 5월 여강 벽사(甓寺 : 神勒寺, 속칭 벽절)에 둔진하고 나루를 왕래하는 일본군을 차단하고, 그들의 장물(裝物)을 빼앗아 행재소(行在所)에 보냈다.
6월에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일본군이 민가를 약탈하자 원호는 지역 병사들을 불러 모은 뒤, 그들을 급습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이 전공으로 원호는 여주목사 겸 경기ㆍ강원도방어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마탄(馬灘) 방면에서 일본군이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천부사 변응성(邊應星)과 모의하여 마탄에 주둔한 적을 다수 사살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적이 원주를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천ㆍ여주ㆍ양근ㆍ지평 사람들이 적의 예봉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뒤 원호가 강원도순찰사 유영길(柳永吉)의 명을 받고 김화싸움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니 여강의 방어선은 무너지게 되었다.